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원왕후 (문단 편집) === 순조의 즉위 === [[정조(조선)|정조]]는 재위 후기로 갈수록 건강이 나빠진 탓에 왕위에 오래 있을 수 없음과 자신이 25년간 구상해온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실 정조 시기의 정치는 정조 1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제였고, 정조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고작 11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세자(순조)가 정국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 지는 불투명했다. 게다가 [[사도세자]] 추숭(追崇) 문제와 관련하여 노론 [[벽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벽파는 버젓이 건재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조선)|정조]]는 [[순조|세자]]에게 후견인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해 온 [[세도정치]]에 손을 대게 되었다. [[시파]]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노론]] 명가 [[안동 김씨]] 가문에게 손을 내밀어 사돈을 맺고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자신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는지 세자빈 간택도 전통대로 삼간택이 아닌 민가처럼 중매로 하는 게 어떻냐고 신하들에게 말을 흘릴 정도였다. 물론 신하들은 반대했다. 나중에야 삼간택이 열렸지만 정황이 이랬으니 정조가 죽은 뒤에도 정순왕후나 신하들도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정조(조선)|정조]] 24년(1800) [[2월 26일]] 초[[간택]]되었고 같은 해 윤 [[4월 9일]] 재간택되어 순조의 정비로 내정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순조]]가 [[김조순]]의 집에 갔다가, 1살 연상인 순원왕후를 보고는 첫눈에 반해서 '김조순의 딸이 아니면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정조에게 조르자, [[정조(조선)|정조]]가 그걸 받아들였다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