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원왕후 (문단 편집) === [[순조]]의 친정 === 그런데 일이 다 끝난 이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순조 3년 12월에 수렴을 거두자 바로 문제가 터졌다. 권유가 순조 재위 1년에 순원왕후와 순조의 국혼에 반대 의견을 상소한 게 쟁점화되어, 대간들이 권유를 탄핵하고 국문이 열리게 됐다. 권유는 역적 토벌에 대한 소를 올리면서 말미에 곡돌사신이란 용어를 인용하며 "[[안동 김씨]] 가문은 자신이 역적인 줄도 모르는 자들"이라면서 극딜을 했는데, 대혼이 확정되고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물러난 이후 제대로 한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에는 심환지가 '안동 김씨가 충성스러운 명문가인 걸 누가 모르나요? 저놈이 무식해서 믿을 줄 몰라서 그런가 봄.'이라고 대충 넘어갔으나 이미 그의 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 심환지도 죽고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도 물러나자 시파는 권유를 타겟으로 삼았다. 권유는 국문을 받고 상소를 올리기 전에 좋아한 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고변하게 되고 그 발언도 소상히 실토하게 된다. 시파는 "대혼을 저지하여 선왕의 뜻을 거스른 역적을 처벌하라"면서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불쾌해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는 수렴을 거둔지 6개월만에 다시 수렴을 치고 해명에 나서려 했으나, 이시수에게 유교 법도상 제지당해 도리어 사과하고 물러나야 했으며, 삼간택과 가례 택일에 관련하여 자신에 관한 의혹을 해명하는 글을 내려 "내가 대혼을 저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대혼 저지 기도를 막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몇달 후 죽었다. 그렇게 순원왕후의 지위는 매우 굳건해졌다. 순조가 병이 들자 [[효명세자]]와 정사를 논의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