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원왕후 (문단 편집) === 2번의 [[수렴청정]] === 순원왕후가 다시 역사에 중요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은 1834년 11월 순조가 죽고 고작 8살인 세손 [[헌종(조선)|헌종]]이 즉위해 [[수렴청정]]을 맡게 되면서였다. 세손의 친모인 [[신정왕후 조씨]]도 있었지만 왕실의 큰어른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관례이고 신정왕후는 이 당시엔 명목상 [[왕비]]가 아닌 '세자빈'이었으므로 당연히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을 맡았다. 순원왕후는 친정 [[안동 김씨]] 가문의 오라비들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정국 운영에 나섰다. 헌종이 이후 친정을 할 때 친위군을 강화하고 [[안동 김씨]]를 내치자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며 헌종과 갈등 관계가 심했다. 순원왕후 언문 어찰에서는 그가 헌종이 죽기 며칠 전엔 손자를 폐위하기를(!) 바랐고, 그가 죽자 '거리 낄 것이 없어서 속 시원하다'(!!)고 여겼다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 실록에서만 해도 죽은 헌종에 대해 '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처음엔 헌종을 아꼈지만, 이후로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어린 손자로밖에 생각하지 못한 모양. 이 정도면 [[정조(조선)|정조]]와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보다도 더 심한 정도인데, 헌종 독살설이 불거지는 이유이다.[* 순원왕후가 살아 생전에 남편 순조가 안동 김씨와 손을 잡고 경주 김씨 일가를 박살낸 과정을 두 눈으로 보았다는 점을 생각하자.] 그러나 같은 어찰에서 안동 김씨 김흥근이 유배당했을 때, 순원왕후가 감싸주지 않았다며 그녀를 질타하는 여론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성록에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순원왕후는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뜻을 표명한다. 또한 철종의 왕비를 선택할 때도 안동 김씨에서는 단자를 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는데, 이는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 일원이기 전에 왕실의 큰어른으로 선은 지켰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위인 부마에게 "변은 잘 누었냐?"며 확인을 할 정도로 언문 편지에 기탄없이 (왕을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언급했고, 손자 헌종이 죽은 후에도 "성군이 되실 자격이 충분했는데", "이처럼 일찍 사망하니 그림으로 그린 떡과 같이 아깝고 원통하며 불쌍하다."고 애통해하고 있다. 손자의 파격적인 행보에 보수적으로 반응했을지언정, 순원왕후 본인이 안동 김씨 수장으로 독살을 주도했으리라 보는 것이 옳을까 의문. 안동 김씨를 '우리 가문', 왕가를 '내 가문'으로 표현한 것이 순원왕후 어찰의 특징이다. 자세한 내용은 [[헌종(조선)|헌종]] 항목 참조.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헌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그녀는 전계군의 아들 [[철종(조선)|이원범]]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고 순조의 아들, 즉 [[양자(가족)|양자]]로 삼았다. 그녀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고, 수렴청정을 끝내고 몆년뒤인 1857년 68세 나이에 담체(현대의 심근경색질환)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왕통을 이을 때 며느리인 [[신정왕후 조씨]]와의 암투에서 이겨서 일부러 일자무식 농민인 이원범을 지목해서 친정인 안동 김씨 가문의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려 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오해이다. 당시엔 이원범 말고는 정말로 왕통을 이을 만한 후계자가 없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왕실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상대로 뭘 어쩌려 했다는 것부터가 허무맹랑한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