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정효황후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시기 ====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수십 년 만에 귀국한 [[동서]] [[이방자]](1963년 귀국) 여사, [[시누이]] [[덕혜옹주]](1962년 귀국)와 함께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한 탓에 항상 [[영친왕]]을 아끼며 하루 빨리 환국하기만을 바랐지만 정작 영친왕은 뇌출혈 후유증 때문에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서 귀국하고 곧 다시 병원에 입원해 만날 수 없었고, 결국 황후는 영친왕이 입원한 [[명동성모병원]]과 지척인[* [[창덕궁]]([[돈화문]] 기준)과는 직선거리로 2km도 떨어져 있지 않다.] [[창덕궁]]에 머물면서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면하지 못했다. [[이석]]의 말에 따르면 가수가 되었던 이석을 보고 '''"나라가 망하니 네가 광대로 전락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1962년에서 1963년 경에 잠시 [[덕성여자중학교]]에서 수예를 가르쳤다는 증언이 있다.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인사도 받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창 밖만 보고 있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공부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어]], [[영어]], [[불경]] 공부에도 매진했으며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智月)'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1ca820ed7cef40e37d7f0d07c9d034f23212cf9037a843b68284d7eed0f5b7c.jpg|width=38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royaltombs.cha.go.kr/r_tombs0403_p01.jpg|width=400]]}}} || || 1966년 2월 13일, 창덕궁을 떠나는 황후의 장례 행렬 || 유릉 전경 || 1966년 2월 3일, [[창덕궁 낙선재]]의 [[창덕궁 석복헌|석복헌]]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장례를 위해 소집된 윤황후장의준비위원회는 2월 6일 [[종묘]]와 유릉에 윤황후 승하 고유제를 지냈고, 2월 7일 시호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로 정했다. 2월 8일에는 성복제와 입관이, 2월 9일에는 조제와 고묘가 있었다. 2월 13일 오전 10시에 창덕궁에서 발인한 뒤 금곡에 도착한 황후의 재궁은 오후 1시에 하관되어 남편이 잠든 유릉(裕陵)에 합장되었다.[* 출처 : 1966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7면.] 신위는 [[1968년]] [[10월 23일]] 부태묘제를 거행한 후 [[종묘]] 정전 제19실에 배향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0240032920302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10-24&officeId=00032&pageNo=3&printNo=7092&publishType=00020|기사]] 그녀의 장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