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정효황후 (문단 편집) ===== [[6.25 전쟁]] 시기 ===== 한편 새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낙선재]]에서 살고 있던 순정효황후를 비롯한 구황실[* 당시엔 구왕궁으로 불렀다.] 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순정효황후는 [[한강철교]], [[한강대교|한강인도교]], [[광진교]] 폭파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과 함께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겨지게 된다. 이승만이 왜 구황실을 박대했느냐면 이승만 본인이 만민공동회 사건 때 고종에게 감정의 앙금이 있었으며 [[고종]]의 외교적 안목도 한심하다 평했을 정도로 몹시 싫어했던 데다가 한반도의 유일한 지도자는 자기라는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자신을 프린스라고 소개하고 다녔던 적이 있는 이승만으로서는[* 왕족이라기엔 너무 까마득하지만,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이긴 하다.] 자기처럼 프린스를 자칭한 게 아니라 진짜 황족인 구황실 사람이 고깝게 보였던 것. 전 왕조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현 왕조가 전 왕조의 왕족과 자손들을 껄끄러운 존재로 여겨 제거하거나, 숙청하고 설사 살려주더라도 냉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반대로 이승만을 싫어하고 전주 이씨가 아니어서 구황실 정통성 문제와도 관련이 없고 오히려 매우 확실한 정통성 확보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구황실을 잘 보살펴주고 [[영친왕]]ㆍ[[이방자]] 부부와 [[덕혜옹주]]의 국적 회복과 귀국도 허가해주었다.[* 박정희의 정통성은 김구 아들 김신 공군참모총장이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미 확보가 어느 정도 된 상태다.] 인터넷에 순정효황후의 이야기 중 하나로 떠도는 것 중 [[창덕궁 낙선재]]에 군홧발로 난입한 인민군들이 "윤비가 누구야!"라고 행패를 부리자 상궁들은 와들와들 떨었지만 순정효황후는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썩 물러가거라!"라고 호통을 쳐 그 기세에 주눅든 인민군들이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내용이다.''' 실제로는 1966년 2월 4일, 12일에 발간된 경향신문의 기사에 나온 순정효황후와 함께 하였던 김명길 상궁의 증언과 1966년 2월 3일자 한국일보 <윤비의 생애> 기사 등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최후의 서울 방어 전투인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95%84%EB%A6%AC_%EC%A0%84%ED%88%AC|미아리 전투]]에서 국군이 패배하면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시작했던 [[1950년]] 6월 28일 오전 8시 무렵, [[미아리]]를 거쳐 내려온 인민군이 [[PPSh-41|다발총]]을 앞세우고 [[창덕궁 낙선재]] 뜰 앞까지 와서 내전으로 들이닥쳐 방을 뒤지다가 '누가 임금 부인이냐,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상궁]]들은 '마마께서는 여기 안 계신다, 우리는 잡일하는 일꾼이다'라고 둘러댔지만 그 가운데 정좌한 채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이 황후라는 사실을 인민군이 눈치채자 김명길, 박창복, 성옥염 세 상궁이 황후를 감싸고 '병환이 나서 꼼짝도 못하신다'며 애걸복걸해 일단 화는 면했다. 증언에 따를 때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댄 상황에서도 황후가 미동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던 것은 사실이긴 하나, 이것이 인민군에게 호통친 것으로까지 와전되어 인터넷상에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닷새 동안 인민군이 [[낙선재]]에서 계속 숙식을 취하자 상궁들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황후의 병환 치료를 명분으로 인민군에게 바깥 출입을 허락받아 황후를 모시고 창덕궁 뒷문으로 탈출했다. 탈출 직후엔 황후의 백모인 [[흥친왕비]] 여주 이씨가 기거하던 [[운현궁]]의 [[비자(동음이의어)#s-4|비자]]가 황후 일행을 운현궁으로 안내해 피신(이어)시켰다. 이후 [[9.28 서울 수복]] 때까지 황후 일행은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 당시 운현궁 관리인이었던 김택수 씨가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인민군에 가담하는 척까지 한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http://www.food.co.kr/food/board.php?board=clue&command=body&no=19]]]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으나 결국 1951년 [[1.4 후퇴]] 때 비행기편으로[* 김명길 상궁의 회고록 <낙선재 주변>에 따르면 [[미군]]들이 윤황후를 위해 비행기를 내주었으나 김명길 본인은 머리가 자주 아파서 기차를 타고 피난지에서 윤황후와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에 있는[* 당시 [[경남도청]]이 [[부산시]]에 있었다. 당시의 도청은 현재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며, 구 경남지사 관사는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이다. 여기서 도청과 관사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부산이 전쟁으로 임시 천도되었을 때 경남도청과 경남지사 관사가 각각 임시 정부청사와 임시 경무대(현 [[청와대]])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양성봉]][* 경남지사 이임 전에는 초대 [[부산광역시장|부산부윤]]을 지냈으며 경남지사 이후에는 [[농림축산식품부장관|농림부장관]]으로 영전한다.] 당시 [[경남지사]]의 관사로 피난갔으나 그곳에 오래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동래포교당[* 동래 [[범어사]] 소속의 [[불교]] 선원. 지금은 법륜사가 그 자리에 있다.]이란 사찰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곳의 [[승려]]와 불교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한 시민의 추천으로 구포의 한 집에서 서민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순정효황후는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승만은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정릉(서울 성북)|정릉]]의 인수재(仁修齋)[* 1966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백낙승]] 씨 댁"으로 기재되어 있다. 백낙승은 일제강점기 부를 쌓은 기업인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백남준]]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에서 지내게 되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5820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