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종(대한제국) (문단 편집) === 식민지 조선의 창덕궁 이왕 === [[경술국치|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 [[일제강점기|조선]] [[왕공족]](王公族)으로서 일본 황족보다 낮고 일본 귀족인, 화족 계층보다는 높은 [[이왕]](李王) 직위를 받게 된다. 거처인 [[창덕궁]]을 마치 일본 황족의 [[미야고]]처럼 붙여 쇼토쿠큐(昌德宮) 이왕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徳寿宮」や「昌徳宮」は御宮殿の名前であり、皇族の宮号である「梨本宮」や「高松宮」とは異なって、「昌徳宮殿下」とは言わず、「李王垠殿下」のように名前で呼んだ。 창덕궁(昌徳宮)을 일본어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http://dl.ndl.go.jp/info:ndljp/pid/1243180/169|『大日本詔勅謹解』]] 5권(政治経済篇, 319쪽 - 320쪽)에는 >"이왕 책립의 조서/전 한국 황제를 책봉하여 왕으로 하고 창덕궁(しやうとくきう) 이왕(りわう)이라 칭하며 … 황태자 및 장래의 후계자를 왕세자라고 하며, 태황제를 태왕으로 하고, 덕수궁(とくじゆきう) 이태왕(りたいわう)이라 칭하며… >(李王冊立ノ詔書/前韓國皇帝ヲ冊シテ王ト爲シ、昌德宮(しやうとくきう)李王(りわう)ト稱シ、…皇太子及ヒ將來ノ世嗣ヲ王世子トシ、太皇帝ヲ太王ト爲シ、德壽宮(とくじゆきう)李太王(りたいわう)ト稱シ、… 라는 내용을 통해 일본식 훈독인 '쇼토쿠노미야'라고 읽지 않고 음독으로 "쇼토쿠큐"(현대식 표기로 しょうとくきゅう)라고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잃은 뒤로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며 [[당구]]를 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지만, 어느 날 당구를 치다 쓰러진 후로는 그나마 당구조차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종의 장례식 때는 양복이나 일본 옷을 입은 문상객이 오면 아예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서 좌중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을 왔다는 증언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6Bo8ddmfsY, 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5uci3iSM4M, width=100%)]}}} || || {{{#683235 '''순종 장례 행렬'''}}} || {{{#683235 '''순종 장례식을 알리는'''}}} [[파테|{{{#683235 '''파테'''}}}]] {{{#683235 '''영상'''}}} ||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당시 요시히토 황태자와 만나서 [[:파일:Sunjong_&_Yoshihito_in_Korea_1907.jpg|기념 촬영]]을 한 바 있고, 10년만인 1917년 6월 방일해 [[다이쇼 덴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7818#home|#]] 말년의 순종이 [[아편]] 중독에 빠졌음을 시사하는 독일 기자의 접견기가 남아 있다. 자신을 죽일 뻔한 약이었음에도, 이미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몸과 망국의 한을 마약으로라도 잊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https://blog.naver.com/minjune98/222857798067|#]] 순종은 결국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52세를 일기로 자식 없이 붕어하였는데, 순종의 국장을 기회로 제2의 [[3.1 운동]]을 시도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왕]]의 위(位)는 [[영친왕]]에게로 이어졌다. 죽기 전 [[일본군]] 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https://www.jacar.archives.go.jp/aj/meta/result?IS_KEY_S1=A10110717300&SUM_KIND=SimpleSummary&IS_KIND=detail&IS_SCH=META&IS_STYLE=default&IS_START=1&IS_EXTSCH=&DEF_XSL=default&IS_SORT_KND=ASC&IS_SORT_FLD=&IS_TAG_S1=InD&IS_LYD_DIV=&LIST_VIEW=&ON_LYD=on|#]]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遺詔)가 있는데, 궁내부 관리인 [[조정구(1860)|조정구]]에게 구술하도록 했고, 이 유언은 미국의 한인 신문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0826081551|《신한민보(新韓民報)》에 실렸다.]] 주 내용은 '[[경술국치|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 교수가 이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 일반에 공개했다. 다만 의문점은 조정구는 순종이 죽기 전인 1926년 3월 말에 이미 사망했다는 점인데, 유언을 꼭 죽기 직전에 남기지는 않으므로 조정구가 죽기 전 순종이 미리 유조를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를 증명할 뚜렷한 증거는 없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유릉(裕陵). 고종의 홍릉과 마찬가지로 '''황제릉'''의 형식으로 꾸몄다. 이 능에는 순종, 순종의 첫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능제 중 유일한 '''3인 합장릉 형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