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종(대한제국) (문단 편집) == 기타 == * 마지막으로 순종을 모신 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채로운 식사를 즐긴 아버지 고종과 달리 좋아하는 음식이 딱히 없었으며 수라를 올려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물에 만 밥만 겨우 먹어서 수라간의 나인들이 수라 때마다 쩔쩔 맸다고 한다. 또한 치아가 부실해 딱딱한 것을 먹기 어려운지라 깍두기도 삶은 무로 담갔다고 한다. * 야사에 [[궁녀]]가 순종에게 여러 이야기를 읽어주다 망국(亡國)의 이야기가 실린 대목을 읽자 그 궁녀의 뺨을 치며 자신을 능멸하지 말라며 분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순종 행장(行葬)에도 표현을 약간 순화하여 기록하고 있다. >"나이든 궁인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우연히 선조(先朝) 때의 국사(國事)가 어떻다고 말하니, 즉시 엄하게 꾸짖어 물러가라 명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선황제(先皇帝)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궁녀들이 감히 선조(先朝)에 대해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야사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의 순종이 망국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이며, [[암군]]이라는 평가가 강한 고종과 달리 등극 때부터 아무런 실권도 없이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 *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최초로 개방한 황제다. 물론 일본의 강요가 크긴 했지만, 순종 본인의 의지도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창경궁]]과 창경궁에서 보관하고 있던 황실 유물들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경복궁]] 내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문제는 이게 국권이 피탈된 이후에는 완전 놀이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창경궁이 1909년 [[창경원]]이 된 이후에도 계속 그곳에서 거처했다. 창경원 개원식에는 모닝코트와 중절모에 구두를 신고 지팡이까지 짚는 등 말끔한 양복을 입고 참석했다. 당시 창경원 개원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 초대 [[일본 총리|내각총리대신]]과 초대 [[한국통감부|한국통감]]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였는데, 개원식 닷새 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암살당하여]] 정작 식(式)에는 참석을 못했다. 순종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 창경원이 폐쇄되었는데, 순종이 직접 창경원에서 산책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중화 문명권에선 궁궐을 개방하는 걸 무례하다 생각했지만 서양의 경우 궁궐을 개방해서 평민들에게까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곤 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고종 어극(즉위) 40주년 칭경 기념비(속칭 비각)의 현판 글씨는 그가 황태자 시절에 쓴 것이다. 현판을 잘 보면 끝에 '예필(睿筆)'이라고 쓰여 있는데, '예필'이란 '황태자가 쓴 글씨'를 말한다. 순종이 생전에 남긴 글씨들은 질적 편차가 매우 심한데, 이는 생전에 그에게 잔병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본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린 시절이면 몰라도 고종의 칭제 무렵에는 글씨체가 많이 원숙해진 것으로 보이며 [[경술국치]] 이후 남긴 글씨도 매우 세련되어 있다. 《선원화보》에 실린 순종의 필적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는데, 내용을 보면 순종은 무기력했을지언정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君臣同心 民國多福 朕信內閣 卿勿負國 > "임금과 신하가 같은 마음이어야 백성과 나라가 많은 복을 누린다. 짐은 내각을 믿으니 경은 [[경술국치|나라를 저버리지 말라]]."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내셔널리그]] 중부 지구 소속팀 [[시카고 컵스]]가 [[2016년]]에 마침내 우승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해인 [[1908년]]은 [[대한제국]] 순종이 제위에 있을 때였다. 이것을 떡밥 삼아서 얘기할 때 알기 쉽게 "순종 2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지금에서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묘호이므로 당대에는 쓰일 수 없는 표현이고, 대한제국 이후로 독자적인 연호를 쓴 이상 공식적인 경우에는 '융희 2년'이라고 쓰는게 더 적절하단 점은 염두에 두면 좋다. 미디어에서는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례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드라마)|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 임금의 교지를 신하가 대독할 때 "정조 1년"이라는 표현을 써서 비판받은 바 있다. 정조 1년(원년)인 [[1776년]]은 [[청나라]] [[건륭제]]의 재위 기간이므로 건륭 41년이라고 써야 옳다. 또한 '~조, ~종' 등은 임금이 승하한 후에 붙이는 묘호이므로 '정조 1년'이라는 말 자체가 정조 생존 시에는 나올 수 없는 호칭이다. * 세자 시절부터 신문물을 신기해해서 세창양행을 통해 [[시계]] 등 이런저런 물건을 사들여 수집했다고 하며, 이는 왕실 재정에 다소 부담을 주기도 했다. 특히 시계의 경우, 순종은 근대 시기의 황제답게 [[회중시계]]를 사용했다. '''[[바쉐론 콘스탄틴]]''' 오픈 페이스 회중 시계이고 뒷면에는 황가의 문양인 이화문이 새겨져 있다. 출처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모 경매 회사를 통해 출품되었으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개인 수집가에게 1억 2500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anchor(회중시계앵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acheron Constantin 회중시계_순종.jpg|width=100%]]}}} || || {{{#683235 '''순종의 회중시계.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만들었다.'''}}} || * 역대 조선의 세자들과 비슷하게 5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성균관]]에 입교해 공부했다. 의사 올리버 애비슨의 회고에 따르면 수천 자의 한자를 알고 있었지만 의미를 알고 쓰기보다는 받아쓰기 정도를 할 실력이었다고 하며, 단순히 사물과 이름을 연결짓는 기억력이 비상할 뿐이라고 한다. 순종이 남긴 문집을 보면 (대필이나 누군가가 불러준 게 아닌 이상) 기본 이상의 한문 구사력은 갖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당한 [[독서광]]으로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덕에 [[보학]](譜學)에 밝아서 자신과 마주 앉은 사람의 본관과 이름만 듣고도 상대의 [[항렬]]을 알아내 몇 대손인지 맞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직계 조상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독한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예법에서는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게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일례로 19세기 [[풍양 조씨]] 세도가의 일원이었던 조병구는 고도 근시자여서 평소 안경을 끼고 생활했는데 당시 임금 [[헌종(조선)|헌종]]의 면전에서도 안경을 쓰고 나타나자 헌종은 평소답지 않게 진노하며 그를 크게 나무랐다고 한다. 결국 두려움에 휩싸인 조병구는 그날 자신의 집에서 음독 자살했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총리로 활약한 [[윈스턴 처칠]]과는 동갑인데다가 [[대한민국]]의 최초 대통령인 [[이승만]]과는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또한 [[김구]]와도 겨우 두 살 차이다. * 일본 제국의 [[다이쇼 덴노]]와 비슷한 점이 은근 있다. 아버지가 [[1852년]]생이며, 둘 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있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가 같은 년도에 죽었다. * 고려 [[순종(고려)|순종]]과 공통점이 있다. *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 육신이 악화되었다.[* 고려 순종은 부왕 문종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약했던 몸이 더 악화되어 즉위한지 3개월만에 죽었고, 조선 순종은 김홍륙 암살 사건으로 인해 멋도 모르고 커피를 마셨다가 몸이 더 악화되었다.] * 37살에 죽었거나[* 고려 순종] 퇴위되었다.[* 조선 순종] * 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