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천시/역사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 명목상으로는 [[마한]]의 일부였고, 근초고왕 때부터는 백제의 마한연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백제의 간접 지배지였다. 다만 [[신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소국 연맹체 [[침미다례]]는 백제의 견제 탓에 전라도 동부로는 전혀 세력을 뻗치지 못했기에, 순천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종래의 마한 소국은 침미다례와는 무관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475년 [[한성백제]]가 수도 [[위례성]] 함락으로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 전부터도 무역을 통해 전라도 일대에 그 영향력을 투사해가던 [[반파국]](대가야)이 이러한 틈을 타 순천을 포함한 [[전라도|호남]] 동부 지역에 진출했고, 이때 순천은 사타국(娑陀国)이라고 불렸다. 고락산성에서 [[가야토기]]가 출토되었고 특히 서면 운평리 고분군의 묘제와 토기 주류가 반파국 양식임이 밝혀져 대가야의 호남 진출 때 순천 일대도 반파국에 복속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반파국이 사타국을 직접 지배화한 건 아니고, 사타국 입장에선 프랜차이즈 모기업을 백제에서 대가야로 바꿨다고 여기는 정도 입장이었다. 백제는 어떻게든 간접 지배지를 직접 지배지로 바꾸려는 입장을 그 존속 기간 동안 한 번도 바꾼 바 없었던 반면 반파국은 여간해선 휘하 소국들의 권익을 보장해준 편이었으니, 사타국 입장에선 반파국이 백제보다 훨씬 나은 파트너였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마한연맹의 새로운 맹주국을 자처하고 마한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그 수백 년 전인 [[고이왕]] 시절부터 분명히 한 백제 입장에서,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결국 세력을 회복한 [[백제]]는 [[무령왕]] 시기인 512년도에 반파국을 꺾은 후, 반파국이 주도하는 가야연맹의 가맹국이었던 사타국을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화하였으며, 이때부터 순천 일대는 [[백제]]의 직접 지배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감평군(欿平郡)[* 이칭은 사평군(沙平郡), 무평군(武平郡).]이라고 불렸으며, 원촌현([[여수시|여수]]), 돌산현([[여수시/행정#s-3-1|돌산 지역]]), 마로현([[광양시|광양]])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이후 전라도 동부는 백제가 520년대 초반까지 약 십 년 동안 반파국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영토를 빼앗기고 빼앗는 전장이 되지만, 순천, 여수, 광양 일대는 한번도 빼앗기지 않고 확고하게 장악했다. 이후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신라가 밀고 들어와서 백제는 반파국에게 어렵게 되찾은 전라도 동부 일대(남원, 장수 일대)를 다시 신라에게 잃게 되는데, 이때도 순천, 광양, 여수만큼은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기지 않고 확고하게 백제령으로 유지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이 일대를 빼앗기면 옛 침미다례 일대도 방어가 어려워질 게 뻔했으니, 백제 입장에선 다른 곳은 내줘도 순천, 여수, 광양은 결코 내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660년 백제 멸망 후 663년까지의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신라의 군현으로 편성된다. [[남북국시대]]인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승평군(昇平郡)으로 개칭하고 해읍현(海邑縣), 여산현(廬山縣), 희양현(陽縣)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 의해서는 승주(昇州)로 불리었고 이에 [[후삼국시대]] 기록에도 승주로 나타난다. 호족 [[박영규]]가 웅거하였으며, 이후 [[후백제]]의 강역이 되고 박영규는 후백제왕 [[견훤]]의 사위가 된다. 후백제가 일리천 전투 결과로 멸망한 후에는 고려의 군현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