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헌황귀비 (문단 편집) == 생애 == 8살 때 [[궁녀]]로 입궐해서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다가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명성황후에게 진노를 샀고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엄 상궁이 32세 때의 일이다. 그 후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후 고종은 엄상궁을 궁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명성황후에게 엄 상궁이 내쫓긴 지 10년 후인 때였다.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궁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심에 엄 상궁이 있었다. 엄 상궁은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다. 일본의 서릿발 같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두 채의 가마로 궁을 드나들며 경계를 늦췄던 엄 상궁은, 1896년 2월 11일 대담하게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황제|순종]]을 가마에 태우고[* 상궁의 가마로 위장했다.] 러시아 [[아관파천|공관(아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듬해,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 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들을 낳는다. [* 첫 임신 나이가 평균 만 30세가 한참 넘는 지금 기준으로도 44세면 엄청난 노산인데, 이 당시 40대 중반이면 자식들이 장성하여 손주 여럿 보았을 나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들을 낳기 위해 [[북한산]]에 산신각까지 짓고 백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만든 약사불과 산신탱화가 남아있다고 한다. 서울 [[남산(서울)|남산]]에 있는 와룡묘(臥龍廟) 제석전에서 엄 귀비가 빌어 [[영친왕]]을 낳았고, 나중에 엄 귀비가 와룡묘 안에 삼성각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 상궁은 정식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되어 귀인, 1900년엔 순빈(淳嬪), 1901년에 순비(淳妃)로 봉해졌다. [[고종황제]]는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궁녀(평민)였고,[* 아마 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참고로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씨]] 역시 궁녀였다. 출신은 천민이라는 설도 있고, 가계가 알려져 있지 않다] [[숙종(조선)|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후궁]] 출신으로서 [[왕비]]가 된 인물은 [[희빈 장씨]]가 마지막이다. 궁녀신분에서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점은 두 사람 다 같지만, 장씨는 당시 재벌 수준의 부를 축적한 역관 집안의 딸이자 [[중인]] 신분으로, 엄씨와는 상당히 차이나는 출신이었다. 외가 역시 명문가로 유명한 [[파평 윤씨]] 집안.] 는 법도 때문.[* 근데 고종 실록상 기록에 의하면 1906년 10월 24일 종2품 대신 노영경 등이 순헌황귀비의 황후 승격을 건의하고 있지만 고종이 오히려 망설이는듯한 태도로 그대들이 말하는 "중대한 예"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 고종 실록상 기록에 의하면 전술한 1906년 10월 24일의 사례를 포함하여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몇 차례 대신들이 엄씨의 황후 책봉을 건의하였는데 모두 고종이 거절하거나 망설이는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래라면 상술했듯 평민이기 때문에 황후가 되는것은 조선[* 사실 한반도 역사상 천민/평민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 군주의 정실부인 자리에 올랐던 사례는 없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말이라도 나온 듯. 1903년 12월,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는 걸로 이 문제는 정리되었다.[* 당시 그녀가 무슨 칭호를 받아야 하는지를 놓고 논의를 했는데, 내장원경 [[이용익]]([[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이후 보전을 [[인촌 김성수]]가 인수하고 해방 후에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시켜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이 [[당나라]] [[양귀비]]의 예를 들어 귀비로 하자고 했다가 나라를 망하게 만든 후궁과 비교했다는 이유로 여러 대신들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송우혜의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1-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에 의하면, 이용익의 말을 들은 엄 상궁이 자존심이 상해 이용익의 반대파를 움직여 꾸민 일인데, 고종은 충신인 이용익을 보호하려고 꼼수를 부려 겉으로는 들어주는 척했지만 어물쩍거리며 미루다가 이용익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 위기를 피하게 했고, 뒤이어 [[베트남]]으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는 명을 내려 공을 세우게 해 없던 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내부대신 이건하가 건의한 '황귀비'로 의견이 모아졌다(『마지막 황태자 시리즈1-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에선 엄 상궁이 황후가 못 될 바엔 미녀인 양귀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일화의 일부가 잘못 알려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후궁이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황후로 대우받았고, 복색도 황후의 복색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귀비로서의 [[의전]]일 뿐, [[황후]]의 의전은 아니었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조선왕조 역사상 중궁이 세상을 떠난 후 계후(繼后)를 들이지 않은 채 후궁으로서 정궁(正宮)의 지위를 사실상 대신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비슷한 예로 [[태조(조선)|태조]]의 후궁인 [[성비 원씨]], [[문종(조선)|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이 있다. 원씨는 [[신덕왕후]] 사후 성비에 봉해진 뒤론 거의 대부분의 국가 현안에 관여할 권한을 부여받고 후궁임에도 태종에게서 어머니 대접을 받았다. 홍씨는 당시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 사후에 내궁이라는 별호를 따로받고 무려 '''명나라의 공인'''도 받아,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국장까지 치른 후에도 고종은 황후 자리를 비워둔 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했을 뿐 계후를 맞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순명효황후|태자비 민씨]]와 사별한 황태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부황의 황후 자리가 비었음에도 부황보다 먼저 [[순정효황후|새 태자비]]를 맞이했다. 사진을 보면 외모는 [[추녀]]에 가까운데, 이를 두고 조선 시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당대에도 엄씨는 박색(못생겼음)으로 평가됐다. 반면에 일부 야사에 의하면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겨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고종을 모시던 시종원 부경 [[정환덕]]의 말에 따르면, 선녀가 하강한 듯 하여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미인이었다고 한다. [* 위에 나온 것처럼 고종이 총애하던 신하인 [[이용익]]이 '''칭호를 귀비로 결정하자고''' 했다가 사형당할 뻔했다. 당시 기준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했다가는 다른 대신들에 의해 인생이 끝장났을 것이다. 사실 이용익의 실수도 있는데, 귀비 칭호의 예시를 들었던게 하필 '''[[양귀비]]'''였다... [[http://waks.aks.ac.kr/dir/searchView.aspx?qType=0&secType=&sType=&sWord=%ed%99%a9%ea%b7%80%eb%b9%84&dataID=AKS-2013-KFR-1230007_DES@1_CFD62-1|해당 발언은 실제로 '''프랑스 외무성에 보고서'''로 올라온 이력이 있다.]]] 성격이 당찬 여걸이었는지, [[일본인]]들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고 간 [[영친왕]]을 귀국시키지 않자 "학교에 [[방학]]도 없느냐?! [[홋카이도]]로 여행을 갔다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것보다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냐!!"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드세기로 이름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에게 말이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7월 20일]]에 [[덕수궁]]에서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57세로 사망했다. 일본은 장티푸스에 전염될 수 있다며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국한 [[영친왕]]이 그녀의 시신 가까이에 가는 걸 막았다. 한 때 이 이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이 일이 일본의 만행으로 잘못 알려져 있던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측의 만행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지만, 이건 상식이 있다면 당연히 막아야 할 일이다. 괜히 사망자의 시신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했다가, 전염병이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 당시에 [[아프리카]] 각국의 정부가 [[에볼라]]에 감염되어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이것이다. 참고로 조선 후기부터는 전염병으로 죽을 경우 사망자의 자손도 되도록 부모의 시신에 접근을 안하는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황귀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영휘원(永徽園)이며, 같은 울타리 안에는 [[영친왕]]의 장남 [[이진(1921)|이진]]이 잠든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엄씨를 제사지내기 위해 1929년에 세운 덕안궁이 [[칠궁]]을 구성하는 마지막 사묘이다. [[영친왕]]을 일찌감치 [[순종황제]]의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영선군]], [[의친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의친왕]]은 생모가 죽은 뒤였던데다 살아 있을 때도 [[명성황후]] 때문에 별 다른 힘이 없었던 탓에 엄 귀비가 원하는대로 영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다. 후계자에 탈락한 건 의친왕의 탕아 기질 때문이었다고도 하는데 판단은 알아서. 하지만 현재 순헌황귀비의 제사를 받들고 있는건 사이가 험악했던 그 의친왕의 후손들이다. 참고로 후사가 없는 순종, 덕혜옹주는 물론 이구의 사망으로 대가 끊겨버린 영친왕 제사도 의친왕의 친손자인 [[이원(1962)|이원]]이 지내고 있다. [[파일:attachment/순헌황귀비/82.jpg]] 오른쪽에 있는 여자가 순헌황귀비 엄씨, 왼쪽은 아들인 [[영친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