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헌황귀비 (문단 편집) == 근대 교육과의 접점 == 나름대로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써서,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처음 이름은 명신여학교였으나, 곧 [[숙명여학교]]로 바뀌었다. 옛 이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숙명여자대학교]]에는 명신관이라는 건물이 있고, [[숙명여자중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의 학교법인 명칭은 명신여학원이다(본래 숙명여중고도 [[숙명여대]]와 함께 숙명학원 소속이었으나, 2013년 재단이 분리됨).]의 설립에 관여했고[* 양정의숙은 순헌황귀비의 7촌 조카 엄주익이, 진명여학교는 순헌황귀비의 사촌 동생(순헌황귀비의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남동생이기도 하다) 엄준원이 설립했는데, 실제로는 순헌황귀비의 명으로 설립했다는 말이 있다. 숙명여학교는 초대 교장인 이정숙이 설립자이기도 하다는 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순헌황귀비가 설립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 후원금을 보냈다. 이 때 자신의 사재를 출연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숙명여자대학교]]의 경영권의 일부를 구 한국 황실과 [[영친왕]]이 갖고 있었는데, [[광복]] 후 이로 인한 소송이 발생했을 때 영친왕 귀국조차 고깝게 여길 정도로 황실을 냉대한 [[이승만 정부]]가 이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아 결국 황실 측이 패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 귀비가 기부한 토지는 [[숙명여대]]의 소유로 인정받아서, [[서울시]]가 몇 번이나 뺏으려고 했지만 매번 재판에 지고 있다. 정작 엄귀비에게 하사받았다는 토지 문서는 행방이 묘연하여, [[숙명여대]]에서 계속 찾으려고 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남태평양의 [[피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증명한 독립 증명서를 분실했다.] 이 외에도 순헌황귀비의 추천으로 입궁하여 [[영친왕]]의 보모로 일했던 최송설당이 김천고등보통학교(후의 [[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를 설립하며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