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화군 (문단 편집) === 수원으로의 [[귀양]]과 여전한 악행들 === 이때부터 순화군은 완전히 [[미친놈]]으로 취급되어 궁궐의 골칫덩어리가 되면서, 결국 선조도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어서 머나먼 수원부(지금의 화성시 화산동)로 [[귀양]]을 가게 되면서 궁궐에서도 쫓겨나고 홀로 떨어져 살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까지도 순화군은 반성하는 모습을 전혀 안 보이고 도리어 왕자임을 내세워 위세나 부려댄 탓에 수원 [[부사#s-3|부사]]조차도 어떻게 단속할 도리가 없었다. 형구를 마음대로 꺼내가서 하인들에게 멋대로 형벌을 가하도록 해서 [[향리]]들이 죽을 지경으로 맞았으며, 관리들도 순화군이 무서워서 도망쳐버린 탓에 수원부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심지어 부사마저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를 보고받은 선조와 조정에서는 단순히 유배시켜 놓는 걸로만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위리안치를 지시했다.[* 유배는 정해진 구역까지는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위리안치는 더 강도가 높은 형벌로, 집을 가시울타리 담장으로 둘러싸 출입을 막고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순화군은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사람을 두들겨 패고, 문을 잠그자 자기 손으로 어떻게든 집요하게 직접 열고 나오는 등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처음 왔을 때 수원부사 최산립(崔山立)은 다른 데로 옮겨지고, 권경우(權慶佑)가 새로이 부임해왔으나, 부임하는 날 즉시 순화군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출관부터 하자, 부사 권경우를 미워한 나머지 패악한 짓을 저지른다. 긴 [[도검|칼]]을 차고 [[말(동물)|말]]을 타고 달려와서는 기둥을 칼로 치면서 "부사(府使)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라고 협박을 하고 그 다음에는 하인에게 [[도장(도구)|도장]]을 찍은 봉지 하나를 가져가게 했는데, 그 안에는 먹으로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린 머리통이다.'라고 써 있었다. 이를 받은 권경우는 겁에 질려 출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수원부사 자리에서 짤렸다. 이후 수원부사는 또다시 박이장(朴而章)으로 교체되었으나, 그도 여전히 순화군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다. 순화군의 집 궁문을 봉쇄해버렸으나, 순화군은 오히려 담장을 헐고 밖을 나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면서 채소밭을 맡고 있는 노(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잡아다가 직접 몽둥이로 20여 차례 두들겨 팼으며,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하러 나갔을 때 잡아다 들여서 두들겨 패고 옷을 불태웠다. 심지어 [[쇠고기]]와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태워 없애기도 했고, 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잡아다가 40차례 직접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또한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이라는 사람을 무수히 구타하거나 역시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 주질재(注叱介)를 붙잡아 옷을 전부 벗겨 결박하고는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장석을시(장돌똥) 사건으로 '''결정타를 콕 찍는다'''. 군사(軍士) 장석을시(張石乙屎)는 집에 질병이 돌아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를 데려다가 역신(疫神)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가서는 한 차례 형문을 한 뒤에 밤새도록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맹무녀를 폭행하고는 그녀의 위아래 치아를 1개씩, 장석을시의 위아래 치아를 9개씩 쇠뭉치로 때려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던 것이다. 무녀는 궁 안에서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으며, 장석을시는 이튿날 풀려났지만, 워낙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던 터라 곧 사망했다고 한다. 결국 수원 사람들이 순화군을 피해 앞다투어 고을을 떠나 도망쳐서 수원이 망할 지경이 돼서,[* 현재의 [[수원시]]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경기도]]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한 것과 동일하게 당시에도 수원은 조선의 행정구역(부목군현) 중에서도 제법 크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현대로 치면 광역시급 도시 하나가 단 한 사람의 악행으로 망할 지경이 되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가택 연금해 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을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는 등 여전히 개망나니짓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의 악명들이 하도 높아서 이들을 사칭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까지도 다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사헌부]]를 비롯해서 순화군을 잡아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조선)|선조]]는 아들의 이런 행각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 두둔하며 처벌은 하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402028_002|실록 기사]]. 하지만 순화군은 성격이 워낙 흉포하여 고쳐질 생각이 없고 계속해서 폭력을 일삼는 등 [[막가파#s-1|막가파]]의 모습은 여전했다. 결국 이런 보고를 계속 받게 되어, 입장이 난처해지며 손을 쓸 수 없게 된 선조는 결국 순화군을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버려 순화군을 도성으로 압송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