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화군 (문단 편집) == 평가 ==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재해)|호환]]을 피하듯 했다. <[[선조실록]]>의 순화군 졸기(卒記)에 기록된 다음 문장이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보다 더하다는 형 [[임해군]]과 [[정원군]]이 얼마나 인간 [[막장]]인지를 짐작케 한다. 물론 임해군과 정원군의 범죄는 [[살인]]과 [[강간]]도 있기는 했지만 주로 [[폭행]]이나 협박을 통한 고위층 [[재산]] 강탈이라서, 피해자들이 고위직들인 데다가 대부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더 많았다. 순화군은 주로 평민층 피해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욕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행패가 덜한 것처럼 여겨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순화군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만 골라서 죽였다는 점에서 임해군보다 더한 [[악질]]임이 분명하다. 순화군이 [[선조(조선)|선조]]의 비호 아래 살인 행각을 계속 벌여온 것이 답답해 보일 수는 있으나 당시 [[의학]]적 지식의 한계와 [[전제군주제]]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전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순화군은 명백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띠고 있으며 '살인 중독'에 빠진 상태이므로[* 순화군은 목적이 있는 살인이 아닌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격리하는 게 최우선인 상황이었으나, 선조 입장에서는 살인을 [[취미]]로 즐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고 순간 욱해서 저지른 실수이겠거니 하며 이번만 넘어가면 다음에 또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여긴 듯하다. 결국 순화군이 5년간 살인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자 참고 참은 끝에 선조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로부터 격리해버렸다. 단,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선조의 초기 대처가 매우 미흡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쾌락살인마라는 개념이 알려져있지 않았다고 해도, 선조의 조치는 당대 기준으로 봐도 심각하게 안이했다. 아무리 왕족이라도 사람을 계속해서 재미로 죽이거나 겁탈하는 자가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임금이 나서서 벌을 주거나 사회로부터 격리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겨우 유배를 보내놓은 것으로 그쳤고, 관리라도 똑바로 해야 함에도 '''수원이라는 거대한 고을 하나가 망할 지경이 되도록''' 아무 조치도 안 취하고 방치했다. 단적으로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선조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었다면 사관들이 앞다투어서 '국법이 한심하다'느니 '백성은 무슨 죄인가'라느니 주석을 달면서 간접적으로 선조를 비난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순화군의 살인행각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고위 신료들 기준에서도 선조의 대처엔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