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술라이마니야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이라크 쿠르드.jpg|width=326]]||[[파일:술라이마니야 이라크 2.jpg|width=362]]|| || 셰이크 마흐무드 바르잔지 || 아므나 수라카 박물관 || 1649년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의 완충국으로 세워진 바반 후국은 켈라치왈란을 수도로 삼았는데, 이란에 가까운 탓에 전쟁 때마다 페르시아 군의 공격을 받았다. 따라서 1781년 마흐무드 파샤는 보다 이라크 방면인 멜켄디로의 천도를 구상하여 사라이 (관공서)와 군사 기지를 세웠다. 1783년 그가 사망하고 계승한 이브라힘 파샤는 과거 사파비 원정에 나선 [[술레이만 대제]]가 멜켄디 인근에 세웠던 진영 터를 재활용하여 바자르 및 하맘 (목욕탕)과 궁전을 세웠고, 이듬해 천도하였다. (1784년 11월 14일) 지명은 후자 (혹은 초대 바반 군주인 술레이만 바바)를 기리는 술레이니야로 결정되었고, 멜켄디는 그에 흡수되었다. 1820년경 도시를 방문한 영국인 레치는 2천여 가구가 거주한다고 기록하였다. 19세기 초엽 술라이마니야에는 [[카자르 왕조]]의 탄압을 피해 이란의 쿠르드계 번국인 아르달란 후국에서 쿠르드인들이 다수 망명해왔다. 그중에는 여성 시인 마스투라 아르달란도 있었고, 그녀는 페르시아어로 쿠르드 역사를 저술한 후 1848년 술레이마니야에서 사망하였다. 1850년 바반 후국이 근대화에 나선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후로도 도시는 꾸준히 성장하여 20세기 초엽 1만 인구를 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8년 영국군이 점령하였다. 당시 술라이마니야는 [[쿠르디스탄]]의 중심지였지만 1920년 [[세브르 조약]] 당시 [[디야르바크르]] 일대만이 쿠르드 자치령이 되고 아르빌 ~ 술라이마니야 일대는 영국 위임통치령이 되자 현지 [[쿠르드인]]들은 반발하였다. 그 결과 1921년 10월, 셰이크 마흐무드 바르잔지가 쿠르디스탄 왕국을 선포하였다. 술라이마니야는 그 수도였으나 1924년 7월 영국군에 점령되었다. 그후 마흐무드 바르잔지는 게릴라 활동을 지속하였으나 1932년 공군력까지 동원한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이라크 남부로 유배된다. [[이라크 왕국]]을 거쳐 [[사담 후세인]] 정권기에 술라이마니야에는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을 고문하는 수용 시설이 세워졌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반발로 1991년 봄, [[페쉬메르가]]를 주축으로 봉기가 일어나 쿠르드 자치정부가 설치되었으나 2005년 아르빌로 이전되었다. 2006년 술라이마니야에는 이라크 아메리칸 대학교가 세워졌다. 2011년 2월에는 시위대가 [[쿠르디스탄 민주당]] 본부를 습격하려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