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덕제 (문단 편집) ==== 명나라 공격과 송산 전투 ==== 홍타이지는 오래전부터 [[베이징]]을 취하는 것은 큰 나무를 베는 것과 같아서 먼저 양변을 도끼로 패면 큰 나무가 스스로 넘어간다고 말하곤 했다. 그 양변은 몽골과 조선이었으니 명나라에 대한 공격이 무르익었던 셈이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1634년에 내몽골의 링단 칸에 대해 완승을 거두고 내몽골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내몽골을 평정하고 [[원나라]]의 잔여 세력으로 [[명나라]]를 위협하던 [[북원]]을 정복하여 [[원나라|원조]]의 [[옥새]]를 얻었으며, 원조의 정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복다 칸'''의 칭호를 받아들여 명목상 [[칭기즈 칸]]의 후예인 몽골의 [[대칸]]에 올랐다. 그리고 국호를 [[후금|금(aisin)]]에서 [[청나라|대청(Daicing)]]으로 고치며 [[존호|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 및 [[연호|숭덕(Wesihun Erdemugge)]]으로 [[칭제건원]]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발하는 [[병자호란|조선을 신속하게 공격]]하여 [[삼전도의 굴욕|항복을 받아냈고]]('''정축하성'''), 복종하게 만들어 후방의 위협을 없앰으로써 청군이 [[명청교체기|대명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공고히 만들었다. 이후 [[반간계]]를 이용해 명나라의 의종 [[숭정제]]로 하여금 명장 [[원숭환]]을 참혹하게 죽이게 한 뒤 계속 [[명나라]]를 공격했다. 1638년엔 명나라 내부 깊숙이 쳐들어가 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여 200,000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고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았다. 1641~42년, 명나라와의 결전인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의 명나라 대군 140,000명을 전멸시켰고 산해관 외성들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1642년 11월 초 홍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청군은 연전연승을 거둬 [[명나라]]는 국토가 휩쓸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후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얼마 못 가 1643년 51세라는 한창 나이에 급사했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실 홍타이지는 [[송산 전투]]때 군을 지휘하며 코피를 심하게 흘렸는데 이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청의 [[중국]] 대륙 정복은 아직 어렸던 [[아들]] [[순치제|아이신기오로 풀린]]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