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의야구장 (문단 편집) == 특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59341_446173_3844.jpg|width=100%]]}}} || ||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 외야 펜스의 1988년 모습.''' || 이 구장의 특징은 콘크리트 펜스 위에 덧대어진 철망 펜스였다. 1.5m 높이 콘크리트 펜스 위에 3~6m 높이의 철망 펜스를 덧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뜩이나 그라운드의 규모가 좁은 상황에서 추가 확장이 불가능했던 경기장 여건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심각하게 빈약했던 인천 연고팀의 전력 때문이었다. 숭의야구장은 펜스를 뒤로 밀거나 그라운드를 확장할 수 없는 구조였다.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kbotown&id=1114504&m=search&query=%EA%B5%AC%EC%9E%A5|과거 숭의종합경기장 주변 항공사진을 보면]] 좌중간 쪽의 관중석 외벽이 옛 [[숭의종합경기장|공설운동장 주경기장]]과 벽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기에[* 과거 숭의구장에서 열린 경기 장면을 보면 좌중간 쪽에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나 저축추진중앙협의회의 캠페인 문구 간판이 붙어 있다. 사실 이 간판은 야구장 내벽이 아닌 주경기장 외벽에 부착된 것인데 두 경기장이 워낙 가깝게 붙어있다보니 야구장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경기장을 부수지 않고서는 야구장의 확장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펜스 위에 철망이 없는 상황에서 좌우 91m-중앙 110m의 그라운드 규모라면 홈런이 숱하게 양산돼 [[쿠어스 필드|투수들의 무덤]]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홈플레이트부터 왼쪽 담장까지 극단적으로 좁은 거리를 높은 철망에 의지했던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처럼 펜스 위에 철망을 높이 올렸다. 타구 궤적상 홈런이 될법한 타구가 철망에 맞고 2루타나 단타로 둔갑하는 경우가 왕왕 나왔던 것도 이 철망 때문이다. 철망 펜스의 높이는 구단의 입맛에 따라 달라졌다. 철망이 가장 높았던 시절은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하던 때였다. 이 당시 태평양은 [[양상문]], [[최창호(야구선수)|최창호]], [[박정현(투수)|박정현]], [[정명원]], [[정민태]], [[김홍집]], [[최상덕]], [[위재영]] 등 초특급 투수들이 샘솟듯 등장할 정도로 우월했던 투수력에 비해 타력이 심각하게 허약했기에 호쾌한 홈런을 기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당시 홈런을 기대할 만한 타자라고는 [[윤덕규]], [[김경기]], [[김동기(야구)|김동기]] 뿐이었고 나머지 야수는 그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것에 의의를 둘 정도로 타격 실력이 형편없었다.[* 태평양의 암울했던 타선을 상징할 만한 이들을 꼽으라면 구단의 최전성기였던 [[1994년 한국시리즈]] 당시 [[키스톤 콤비]]인 [[김성갑]]과 [[염경엽]]. 1994년 김성갑의 타율은 0.237 염경엽의 타율은 0.212였다.] 장타력은 둘째치고 컨택조차도 힘들었던 선수들이 유독 태평양에 많았기 때문에 태평양 투수들이 상대팀에게 3점 이하만 내주고도 패한 경기가 수두룩했고 0-1 완투패를 당하는 경우까지도 종종 있었다. 결국 김성근은 '''"어차피 치지 못할 홈런, 맞지도 않겠다"'''는 전략을 내세워 철망 높이를 6m까지 높여버렸다. 아랫쪽 콘크리트 펜스의 높이까지 합한다면 무려 7.5m가 되는 셈. 이 전략이 효험을 본 것인지 김성근의 취임 첫 해인 1989년 태평양은 [[KBO 준플레이오프/1989년|창단 첫 준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넘어 [[KBO 플레이오프/1989년|플레이오프 진출]]의 대성과를 냈다.[* [[김성근]] 감독은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에도 똑같은 전략을 쓰게 된다. 이 당시 쌍방울에도 장타력을 갖춘 [[김기태(1969)|김기태]]와 [[심성보]] 정도를 빼면 죄다 컨택 위주의 타자들만 즐비했기에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펜스를 숭의야구장과 비슷한 형태로 바꿨다. 전주구장도 숭의구장과 마찬가지로 홈플레이트에서 중견수 쪽 담장까지의 거리가 110m에 불과할 정도로 작았고 콘크리트 펜스 높이가 2m 남짓에 불과했다. 과거 전주구장이 [[해태 타이거즈]]의 [[제2 홈구장]]으로 사용되던 시절의 영상을 보면 콘크리트 펜스 위에 별도의 철망이 없었다.]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들어온 [[박영길]] 감독 재임 당시에도 7.5m의 철망 펜스를 유지했으나 박 감독의 후임으로 들어온 [[정동진(1946)|정동진]] 감독은 철망 높이를 5m로 낮추면서 전체 펜스 높이를 6.5m로 바꾸었다. 1996년 팀 간판을 [[현대 유니콘스]]로 바꾼 [[김재박]] 감독 시절에는 철망 높이를 3m로 대폭 줄여 전체 펜스 높이를 4.5m로 최종 조정했다. 그래도 좁은 그라운드의 한계는 감당이 안 되었는지 해태나 삼성같이 타력이 강한 팀과는 당시 제2홈구장이자 숭의야구장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 1999년 [[김재박]] 감독의 요청으로 홈에서 펜스까지의 거리를 5m씩 줄이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좌우 100m-중간 125m, 펜스 높이 4m로, 잠실과 크기는 같으면서 펜스는 더 높았던 초대형 야구장이었다.]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자주 치렀다. 이 경기장은 프로야구 경기장으로도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인천에서 야구를 배우고 선수로 성장한 야구인들에게는 [[동대문야구장]]급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인천 지역의 수많은 학생 야구선수들은 동대문에서 열리는 [[고교야구]] 및 [[한국대학야구|대학야구]] 전국대회에 출전하려면 무조건 이 곳에서 지역 예선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인천 출신 야구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학창시절의 성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 선생이나 [[김진영(1935)|김진영]] 선생부터 80~90년대 야구 스타였던 [[임호균]], [[양승관]], [[김경기]], [[정민태]], [[송지만]]을 거쳐 오늘날 [[류현진]], [[이재원(1988)|이재원]]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리그에서 이름을 알린 인천 출신 스타들에게 숭의야구장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