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정제 (문단 편집) === 인간상 === 숭정제는 통찰력이 있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해서 부지런했다는 장점을 가진 군주였다. 숭정제 자신의 업무 능력과 근면함은 명나라 역사상 비슷한 황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정도이고, 그만큼 부지런한 황제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몇 명 없다. 오죽했으면 황제의 옷소매가 해질 지경이었다. 즉위 초에는 [[위충현]] 일파를 제거하기도 했고, 황제 자신이 상업적인 수완을 발휘해 수만 냥을 국고에 보태기도 했으며, <죄기조>에 따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 백성들에게 잠시 1년만 폐를 끼치겠다.'며 세금을 올리겠다고 호소하면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평 불만없이 묵묵히 받아들였을 정도로 백성들이 숭정제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또, [[청나라|후금]]의 침략에 맞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식 [[화기]] 공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황제 자신이 직접 [[아담 샬]]과 함께 명나라의 과학 기술을 이끌던 [[서광계]]에게 서양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간 명나라가 사용해온 역법이 오래되어 실제 천문과 맞지 않음을 알고는 예수회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서양식 천문지식을 도입한 《숭정력》을 만들었으나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여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역법은 청나라 시기에 《시헌력》으로 완성되었으므로 아주 헛수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성질이 급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단적이었다는 단점이 큰 문제였는데 이로 인해 결국에는 여러 큰 실책들을 저질러 명나라의 멸망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잘못한 부분이 있거나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가 있으면 바로 목을 베는 등 신하들에게 결코 기회를 주지 않아 숭정제 시절의 신하들은 실패하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는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찮다. 숭정제 입장에서는 무능한 황제들이 여럿 거쳐가면서 썩어빠져버린 관리들의 기강을 단시간에 바로잡으려면 저런 방법밖에 없었다는 게 반론의 논지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만력제나 천계제 같은 무능한 황제들이 연속으로 지나간 이 시대와 비슷한 상황을 거쳤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이 정도로 개판이면 이미 수습은 포기하고 현실부정과 폭력으로 연명하려 할 법도 한데 나름대로 현실 감각있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숭정 10년(1637)에 발표한 <죄기조>에서 그는 자신이 다스린 나라의 부패한 현실을 남김없이 솔직하게 지적했다. 이는 숭정제가 당대 명나라의 문제점을 정확히 궤뚫어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몸을 가지고 일을 꾀하는데, 관직을 장사처럼 생각하여 한껏 차지하고도 더 욕심을 부린다. 심지어는 파면을 당하고도 명령을 어기고 마구 긁어모으고 기회만 생기면 배를 채운다. 또 공신이나 척족들도 만족을 모르고 수도와 지역 땅을 탐욕스럽게 사 모은다. 지방관들은 지역 방어의 본분을 잊고 마을을 침탈하는데, 무뢰배들을 수족으로 삼고 간악한 자들을 받아들인다. 못난 관리들은 세력가들이 두려워 꼬리를 치며 아부한다. 악이 쌓여 관아를 좀먹으니 빌미만 생기면 낚아챈다. 오호라! 연약한 백성들이 어찌 편히 발을 뻗고 쉬겠는가!"''' 애초에 숭정제는 '''무능한 사람을 봐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대규모 농민 반란인데, 이 농민 반란의 초기 형태는 신종 [[만력제]] 치세 후반부터 이미 터져나오고 있었다. 관중 지방(현 [[섬서성]])은 중국 역사 내내 경제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으나 송대와 원대를 지나면서 생산력이 급감했다. 명나라 중기 이후로 관중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식량을 보급해주는 행정 체계가 붕괴되고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굶어 죽을 판이 되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던 탈영병들과 농민들이 유민이 되어 무장을 갖춘 뒤 명나라 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농민 반란도 명나라 관군이 적극적으로 진압하여 1637년에는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청나라]]가 대규모 병력으로 북방 방어선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농민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기 직전에 정부 진압군을 동북방 방어선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쟁으로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재정이 파탄났고 1639년부터 자연재해가 겹쳐 기근이 일어나자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농민 반란이 다시 대폭발했다. 실로 절묘한 시점에서 역사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명나라는 멸망했다. 한마디로 숭정제는 분명 괜찮은 군주였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이복형인 천계제가 동생 교육에 꽤 신경을 썼는데,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11세에 형 천계제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