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정제 (문단 편집) === 최후 === 결국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 [[북경]]이 이자성군에게 포위되면서 무너질대로 무너진 명나라의 운명을 실감하게 된 숭정제는 조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자기 살길을 궁리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도 오지 않았고-- 마지막 조회를 열었을때는 이미 북경성이 이자성의 군대에게 함락된 후로 숭정제와 함께 하고 싶었던 대신들도 길이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최후를 각오한 숭정제는 수행하는 [[환관]] '''왕승은'''(王承恩) 한 명만을 뒤따르게 하고[* 다른 기록에는 마지막으로 혈전을 벌이고자 궁궐 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따르라고 했지만 죄다 달아나고, 왕승은 홀로 남아있자 주저앉으며 '이대로는 싸울 수도 없구나.' 탄식하고는 자결했다는 내용도 있다.] 자신의 도포에 >'''''짐이 등극한 지 17년. [[역적]]이 경성을 핍박하니 짐의 보잘것 없음과 박덕함을 하늘조차 꾸짖는구나.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내가 부덕하여 이런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죽어 지하에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명나라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그대들의 분노는 나의 시체에만 풀어주길 바란다."''' 는 글을 남기고 [[회화나무]]에 목을 매 자진했다.[* 북경을 함락한 농민 봉기의 수령 이자성도 이 애통한 유서를 읽고서 감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자성의 농민군은 숭정제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를 보좌했던 관리들이 부패했다고 여겨서 그들을 고문하고 약탈했지만 죽은 숭정제는 무덤을 만들어주며 예우했다. 이후 숭정제가 자살한 그 나무는 청나라도 건드리지 않고 되려 작게나마 제사를 지내, 숭정제의 넋을 위로하게 하여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회유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다만 나무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베어졌고, 현재 있는 나무[[http://blogfiles.naver.net/20140730_45/whitekiw_1406725666778nxA3r_JPEG/IMG_112794.JPG|#]]는 1983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 자신을 따르던 환관 왕승은도 같은 방식으로 그 뒤의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주군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베이징]]에는 '''규료왕승은'''(叫了王承恩)이란 속담이 있다. 직역하면 '왕승은을 불러라'라는 뜻인데,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요즘은 용례가 헤퍼져서 대충 [[노답]]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때 황후 주씨도 자결했는데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씨의 합장묘를 만들고 왕승은의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다소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자성과 그를 따른 반란군은 자신들한테 아부하고자 숭정제를 폭군이라고 비난한 명나라 대신들을 비열한 탐관오리라고 처벌했을 만큼 숭정제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숭정제는 자결하기 전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황태자 주자랑을 포함한 세 아들을 여장시키고 외갓집인 전씨에게 가서 숨어 있도록 탈출시켰다.[* 당시 태자가 16세였고, 그의 동생들도 모두 10대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자성의 군대에 의해 잡혔다. 딸은 2명이 있었는데 장평[[공주]]와 소인공주 모두 "너는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외치면서 자살 직전에 숭정제가 직접 죽이려 했지만, 큰딸 장평공주는 팔 한 쪽만 잃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 때문에 소설가 [[김용(1924)|김용]]은 《[[녹정기]]》에 장평공주 주씨를 '구난'이라는 여승으로 등장시켰다.) 장평공주는 탈출해서 숨어 살다가 청 순치 2년(1645) 순치제에게 글을 올려 용서를 빌며, 이대로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순치제는 큰 위협이 될 것 없다고 판단하여 관대히 대했으나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는 요청은 거부하고, 대신 생전의 명 숭정제가 장평공주의 약혼자로 정한 주현(周顯)과 혼인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1년밖에 되지 않은 164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 (한국식 나이로) 16세 또는 17세에 불과했다. 황족으로 태어나 평민이 되었다가 결혼한 지 1년만에 요절한,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청나라 조정이 내린 시호가 장평(長平)이라 '장평공주'로 알려졌지만, 명 숭정제에게 공주로서 받은 봉호는 '곤흥'(坤興)이었다.]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은 동생들과 함께 이자성에게 붙잡혀 있다가 전란 중에 태자 주자랑은 살해되고, 동생들은 행방불명되었다. 주자랑은 나중에 [[남명]] 정권에서 홍광제에 의해 '순종 도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이었던 태자비 영씨는 살아남아 청나라의 예친왕 [[도르곤]]에게 바쳐졌으나 수절했고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사후 도르곤이 청군과 함께 북경에 입성하면서 자결한 숭정제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