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쉬스창 (문단 편집) === [[홍헌제제]]와 [[호국전쟁]] === 1913년 5월 [[자오빙쥔]] 내각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사퇴한 후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대행을 하다가 7월에 정식 국무총리 선출을 실시하게 되면서 내각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으나 [[량치차오]]의 진보당에서 쉬스창이 국민당의 반대를 받는다는 이유로 [[슝시링]]을 지지하면서 슝시링이 총리가 되었다.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일어나고 5월 신약법이 발표되면서 쉬스창은 국무경에 임명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차차 황제적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했다. 쉬스창은 위안스카이의 옛 친구로 인정받아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쉬스창 본인은 청조의 복고를 주장하는 복벽파였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즉위에 반대하며 국무경에서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12월 25일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 등이 운남에서 호국군을 일으켜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 [[호국전쟁]]을 일으켰고 3차 혁명이라 불리는 토원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제제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쉬스창은 위안스카이에게 더 늦기 전에 제제를 취소할 것을 건의했고 [[펑궈장]], [[장쉰]] 등 남방의 실력가들도 제제 취소를 건의하자 위안스카이는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제제를 취소한 후 3월 22일 쉬스창을 국무경에 임명했다. 3월 25일 쉬스창은 부총통 [[리위안훙]],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함께 군주제가 철회되었으니 전쟁을 멈추고 뒷수습을 하자고 남방에 제안했고 4월 1일 다시 평화회담의 조건을 제시했으나 남방에서는 위안스카이의 퇴진과 외국 추방을 강경히 요구했다. 사태의 악화에 4월 22일 쉬스창은 국무경에서 하야하고 돤치루이가 그 뒤를 이었다. 거듭되는 측근들의 배신과 관계 단절, 독립 통보에 요독증이 급격히 악화된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와 쉬스창을 불러 리위안훙에게 대총통 자리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후 맏아들 위안커딩에게 자신을 섬겼듯이 쉬스창을 섬기라고 당부했다.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죽음을 맞이했고 쉬스창은 [[돤치루이]], [[돤즈구이]], 장진방, [[왕스전]]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임종을 지켰다. 6월 7일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에 취임했고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선포하면서 7월 14일 남방의 군무원이 취소, 8월 1일 구국회가 복구되면서 호국전쟁은 끝났다. 이 시기 쉬스창은 청조를 복고하고 위안스카이를 총리로 하는 신체제를 구상했으나 멸문지화를 염려한 청황실의 반대로 인해 이루어지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