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쉬스창 (문단 편집) === [[1차 직봉전쟁]] === 1921년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하면서 외몽골이 중국의 지배에서 떨어져나갔고 직계와 봉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아 차오쿤의 동생 조예와 찻잔까지 집어던지며 싸운 국무총리 진윈펑이 화가 나 사직을 요청하는 등 정치상황은 개판이었다.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 등 실력자들을 불러모아 중재를 시도하고 외몽골 탈환에 대해 논의하여 1921년 5월 30일 장쭤린을 몽강경략사로 임명하고 외몽골을 정벌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직예군벌인 23사단장 와승빈을 하남독군에 임명하고 28사단장 염상문을 섬서독군에 임명하는 등 직계와 봉계에 적당히 정치적 조정을 해주면서 좀 조용해지나 싶더니.... 1922년 6월 7일 우창에서 왕잔위안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왕잔위안이 축출되자 우페이푸는 즉각 25사단장 소요남을 보내 우한을 점령하고 호북독군에 삼았다. 우페이푸도 양호순열사에 임명되었다. 이 꼴을 본 봉계는 크게 분노했다. 이와중에 1921년 겨울 경제위기로 인해 군비 지급이 중단되어 파업과 집단 사직이 이어졌고 중국은 극심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휩싸였다. 결국 1921년 12월 7일 진윈펑 내각은 사퇴하고 외교총장 [[옌후이칭]]이 국무총리 대리가 되었다. 이후 장쭤린이 교통계 [[량스이]]를 지지하여 12월 24일 총리에 임명되었는데 량스이가 환계 [[돤즈구이]], 장수원, [[취퉁펑]], 진문운, 유순, 위종한 등을 대거 사면하고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려 하자 우페이푸는 량스이를 [[이완용]]같은 자라고 비난하였다. 우페이푸는 량스이와 그 후원자 장쭤린을 동시에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고 [[치셰위안]], [[펑위샹]], [[톈중위]], [[진광원]] 등이 우페이푸를 지지했다. 결국 1922년 4월 봉계와 직계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1차 직봉전쟁]]이 벌어졌는데 우페이푸 등은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출중한 군재들이 많은 반면, 장쭤린의 부대는 사람은 많지만 상당수가 마적단 출신이라 현대적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봉계는 1주일도 안되어 참담히 패해 산해관 너머로 도주했다. 봉계가 패배하자 쉬스창은 [[장징후이]]를 사면하고 안위장군에 임명하는 한편 직군과 봉군에게 원래 위치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며 량스이, 엽공작, 장호삼 등에게만 체포령을 내리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장쭤린에게 엄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여 쉬스창은 5월 10일 장쭤린의 동삼성 순열사 직을 비롯한 공직을 면직했고 5월 11일 몽고경략사직도 폐지했다. 하지만 장쭤린의 쉬스창의 명령에 불복하여 5월 12일, 동삼성의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우쥔성]], [[펑더린]] 등이 장쭤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면서 장쭤린은 6월 4일 동삼성보안총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만주의 기반은 유지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