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슈스이 (문단 편집) == 개발사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은 잠수함을 파견하여 기술과 물자를 교류하였는데 1944년 12월 17일 일본은 伊-29 잠수함을 독일로 보내 [[Me 163]]와 [[Me 262]]의 자료를 받는다.[* 코메트의 면허 생산권을 사려고 무려 '''20,000,000 라이히스마르크'''를 지불했다고 한다. 티거 한 대의 단가가 800,000라이히스마르크 가량 하니까 티거 스물다섯 대 분량의 큰 돈이다.] 이듬해 4월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로리앙 항을 출발하여 7월 14일 일본 점령하의 싱가포르로 귀환한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7월 26일 바시 해협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伊-29 잠수함은 격침되었고 독일로부터 받은 자료들도 함께 수장되고 만다. 다만 싱가포르에서 이와다니 에이치 해군 기술중좌가 몇몇 자료를 가지고 내렸기 때문에 슈스이는 이와다니 중좌가 지닌 자료를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이와다니 중좌가 지닌 자료는 외형도 3장과 로켓 연료의 성분표 및 취급 설명서, 로켓연료 분사시험 속보, 상황분석서였다. 이처럼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슈스이는 완벽하게 코메트를 복제하지 못했고 대신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설계한 부분이 반영되었다. 관민합동연구회 석상에서 기체는 해군 주도로, 엔진은 육군 주도로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해군은 이전부터 로켓엔진을 연구해오던 미쓰비시 중공업에 의뢰하였으나 코메트와 같은 무미익기를 설계해본 경험이 없었던 미쓰비시는 처음에는 개발이 불가하다고 답했다. 결국 해군항공 기술창에서 미쓰비시와 협력하여 슈스이 개발을 진행 하였다. 로켓엔진 개발도 난항에 빠졌는데 일본은 로켓엔진 제작경험이 부족한데다가 미군의 공습과 지진의 영향으로 미쓰비시의 나고야 엔진공장이 파괴되어 요코스카로 옮겨서 개발해야 했다. 결국 발터기관 HKW 109/509 A형을 복제하여 특 로 2호 엔진을 만들긴 했는데 기술력의 한계로 원본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게 만든 데 그친다. 로켓엔진에 들어갈 연료 개발에는 이과학 연구소의 여성 연구원인 가토 치토세 박사가 참가하였고 그녀는 일본의 항공기술개발 역사상 유일하게 참여한 여성으로 기록된다. 슈스이의 시험비행에 앞서 목재로 슈스이 모양을 한 경활공기 MXY8 아키구사를 제작하여 1944년 12월 26일 해군 제312 항공대의 이누즈카 도요히코 대위가 시험 비행을 하였다. 시험비행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자 1945년 1월 8일 엔진과 무장을 밖으로 드러내고 제 모양이 갖춰진 슈스이 중활공기를 만들어 시험 비행하여 성공한다. 마침내 1945년 7월 7일 해군 요코스카 항공대 비행장에서 슈스이의 첫 시험비행을 가지게 된다. 본래는 4월 12일 시험비행을 검토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연기되었다. 제312 항공대의 공정대 분대장인 히로세 유키지 대위와 그 부하들이 정비를 마치고 오후 4시 55분 시험비행을 한다. 본래 오후 2시에 시험 비행을 하려 했으나 엔진 재정비 하느라 늦어진 것이다. 시험 비행의 비행사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이누즈카 대위였다. 처음에는 시험비행에 성공했다고 여겨져 제312 항공대장 야마시타 다테오 비행장이 성공을 뜻하는 흰 깃발을 흔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꼬리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일더니 펑펑펑 소리와 함께 엔진이 꺼져 버렸다. 이누즈카 대위는 엔진을 재가동하고 연료의 비상투입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고 슈스이는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누즈카 대위는 활주로 옆의 황무지로 불시착을 시도했고 그과정에서 우측날개가 감시탑과 부딪혀 기체가 대파한다. 그와 함께 흰 연기가 기체에 피어올랐으나 소방대가 긴급히 방제하여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파인몰드]]의 슈스이 프라모델은 슈스이가 추락하여 일어난 화재를 소방대가 진압하는 이 장면을 박스아트로 쓰고 있다.] 이누즈카 대위는 다음날 두개골 골절로 사망한다. 사고 원인은 연료탱크 상의 구조적인 문제로 급상승시 연료가 제대로 분출되지 않았는데 여기에 연료를 1/3밖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점화가 되지 않았던 것.[* 당장 연료자체가 귀중한 판이라 3분의 1만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제 2호기는 엔진 폭발로 중단되었으며 육군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던 시제기는 탑재할 엔진이 없어서 지바현 가시와 비행장에서 시험 비행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종전을 맞이한다. 시제 3호기 역시 엔진이 없어서 역시 시험비행을 하지 못한다. 애초에 원본인 코메트조차도 결함이 있어 써먹기 힘들었는데 부족한 기술력으로 복제한 슈스이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일본군은 슈스이를 히타치를 비롯한 5개 공장에서 양산하려 했으며 1945년 3월 155기를 시작으로 [[몰락 작전|1946년 3월]]에 3,600기를 실전배치하기로 계획했으나 당시 폭격에 의해 파괴되던 일본의 공업력을 생각해보면 허황된 계획이었다. 전후 시제기 3대는 미군에 접수되어 미국으로 보내졌고 그중 1대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플레인즈 오브 페임 항공박물관에 라이덴과 함께 전시중이다. 1961년 이누즈카 대위가 탑승했던 시제기가 니혼 비행기의 스기타 공장의 확장 공사도중에 발굴되었고 2001년 복원되어 현재는 나고야 항공우주시스템 제작소의 고마키 미나미공장 사료관에 전시 중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