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슝시링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870년 [[후난성|호남성]]에서 태어났다. 호남성 원주 원수경학당의 주기의(朱其懿), 호남성 장사 상수교경서원에서 학자 장형가(張亨嘉) 슬하에서 실용학문을 공부하면서 호남성 변법파의 학맥을 구성하였고 1894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후 [[변법자강운동]]에 호응하여 입헌군주론자가 되었다. 변법자강운동 시기에 진보잠(陳寶箴)과 황준헌(黃遵憲)[* 조선책략을 지은 그 사람이 맞다.]의 지원을 받아 호남성의 개혁을 실시했고 [[청일전쟁]] 이후 불어온 인재육성의 분위기에 발맞춰 1896년 담사동, 당재상 등 호남의 지식인들과 함께 서원개혁론, 학당 설립을 주장했다. 호남성 시무학당이 창립되자 창설비용을 기부하였으며 1897년 1월, <청설호남성시무학당공정(請設湖南時務學堂公呈)>에 연명하여 10월에 시무학당을 창립했다. 1897년 4월 진보잠, 황준헌, 강표, 담사동, 당재상 등 호남의 변법파들과 함께 <상학신보>를 창간했으며 1898년 담사동과 장사에 연년회를 설립해 학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남학회의 조직, 보간 창립, 교육자재 기부 등 교육, 언론 분야에 두루 활동했다. 이후 호남성 시무학당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교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구시대적 교육을 제거하고 경세구국 교육방침을 내세워 호남성의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 시험을 치러 입학시켰고 인품과 학식을 두루 갖춘 교사들을 불러모아 교사진을 꾸렸다. 이후 구미와 일본을 유람하며 각국의 경제를 연구하여 청의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동삼성재정감리관 등 재무관련 관직을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 이후 강소도독부 재정사장을 역임했으며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리위안훙]]의 공화당과 통일당에 입당, [[탕사오이]] 내각 밑에서 1대 재정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고 탕사오이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재정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중화민국의 화폐본위를 [[금본위제도]]로 결정하고 싶어 했으나 현실적인 자본의 부족과 수천년간 중국이 [[은본위제도]]를 채택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은본위제도를 채택하였다. 1912년 6월 [[탕사오이]] 내각이 물러나고 [[루정샹]]이 새 총리가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재무총장에 유임했으나 7월에 사퇴하여 주학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량치차오]]가 진보당을 창당하자 가입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8개 당적을 동시보유하였다. 이후 열하도통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