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슝시링 (문단 편집) === 이후의 활동과 말년 ===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제제운동]]을 벌이자 반대했다. 1918년 [[차이위안페이]], 장건 등과 함께 10월 23일 평화기성회를 조직하여 [[호법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등 내전 중지와 평화 통일을 주장했고 전 대총통 [[펑궈장]], 안휘독군 [[니쓰충]] 등이 여기에 호응하여 11월에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에 발맞춰 [[량치차오]], 왕대섭, 임장민, 법원렴 등 연구계 지식인들과 함께 안복파가 추대한 총통 [[쉬스창]]과의 합작을 추진했고 국민외교협회, 국제연맹동지회를 창설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중국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의 중국 침략에 저항하여 일본의 산동철도 조약 연장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조봉창, [[탕사오이]] 등과 힘을 합쳐 일본과 타협하려는 교통계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유럽외교를 후원하려 했다. 또한 국제전보비용을 사비로 지원하는 등 외교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19년 [[5.4운동]]에 타격을 입은 [[첸넝쉰]] 내각이 붕괴되고 [[궁신잔]] 대리내각이 들어서면서 학생들을 선동해서 사익을 위해 학조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시보>는 슝시링을 매국노로 공격하면서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슝시링은 자신은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죄악정치, 죄악사회와는 더 이상 하늘을 같이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에 매진하여 1920년에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을 창설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마상백, 장병린, [[선쥔루]], 좌순생, [[황옌페이]] 등 60여명과 함께 중화민국국난구제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불러들인 원인은 국내의 일부 인사들이 당치를 표방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정당활동 금지의 해제, 헌법 제정, 집회 결사 자유 보장 등을 주장하며 제1차 헌정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반장항일에 반대하여 장제스가 앞장서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라는 보장항일(保蔣抗日)을 주장했다. 마침 [[1차 양광사변]]과 [[제3차 초공작전]]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중화민국 국가주석 [[장제스]]는 [[린썬]]에게 자리를 내주고 하야했다. 이후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고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연합내각이 출범하자 1932년 4월, 상하이에서 국난회의를 조직하고 평진지역에서 장동손, 이황, 나융기, 후스 등과 함께 참여, 언론, 결사의 자유보장, 헌정실행, 헌법기초위원회 조직법 제정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한 자선사업을 행했다. 상하이 함락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으며 12월에 그곳에서 사망하여 중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민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그의 죽음을 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