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게이트 (문단 편집) === 스웨덴 근현대사의 관점에서 === 스웨덴의 근현대사에서 이런 문화가 나온 것이라는 린네 대학교[*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대학교이다. 린네 대학교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사라 스벤손(Sara Svensson)이라는 대학생이 학사논문으로 쓴 2019년 [[http://www.diva-portal.org/smash/record.jsf?pid=diva2%3A1346437&dswid=7132|#]] [[https://www.diva-portal.org/smash/get/diva2:1346437/FULLTEXT01.pdf|논문]]이 존재한다. 안데르스 브렌드스트룀(Anders Brändström)이 쓴 19세기 스웨덴의 사생아와 편부모가정, 1999년 [[https://www.persee.fr/doc/adh_0066-2062_1999_num_1998_2_1938|#]] [[https://www.persee.fr/doc/adh_0066-2062_1999_num_1998_2_1938|논문]]도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1차 세계 대전]]을 비동맹 중립국가로 넘겼지만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으로 재편된 사회민주노동당이 집권한 1920년대 스웨덴은 공업개발과 도시화를 진행했는데, 이때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하면서 도시로 이주한 하류층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혼인빙자간음죄|혼인빙자간음]]으로 인해 발생한 [[사생아]]를 스웨덴 사회 그 어디에서도 길러주지 않고 간혹 아이의 친모인 미혼모가 육아를 원해도 강제로 아동과 친모를 분리시킨후 위탁 가정에 불하해 고용인 정도의 일은 시키거나 기업체 위탁수련생 명목으로 노예노동을 시켰다. 이로 인하여 스웨덴에서 한세대를 기점으로 인구분포의 재편과 함께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공동체 문화가 단절됐다는 내용이다. 브렌드스트룀의 논문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아동은 원치않는 임신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어미는 자식을 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혼외자로 인하여 지역사회에서 추방당하고 사회적 질서에 단죄당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도 아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죄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였을 때, 많은 사례에서 입증되듯이 이러한 아동은 실질적으로 자원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아동들(사생아들)은 적법한 아동과 같은 가치로 간주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여러 방법으로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대 다수의 혼외자를 출산한 여성들은 그들의 사회적 계층안에서 혼인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점은 지역사회에서 이러한 행위가 완전하게 매도당하고 추방당하지 않았으며 용인된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고아의 대량발생은 궁극적으로 빈곤 문제를 유발했다...." 그나마 다른 유럽 국가들이었다면 [[총력전]]으로 인하여 그런 인력이라도 강제로 병사나 노동력으로라도 써먹었을 테고 이 과정서 강제로라도 공동체적인 문화를 주입했겠지만 스웨덴은 [[나치 독일]]에 [[노르웨이 침공]]의 경로를 터주는 것으로 전화를 피했으니 저런 사생아들을 그런 식으로 써먹을 필요성도 적었을 테니 더더욱 공동체적 사고관을 함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 여기에 1939년 [[겨울전쟁]]으로 유입된 핀란드 난민이나 50~60년대 경제개발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유입한 외국 노동자들과의 융화에 실패하면서 스웨덴의 공동체문화가 급격히 경직된 것이 현세대 스웨덴인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다. 다만 위의 논의가 성립하려면 다음의 요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 (1) 이 시기(트위터와 트게더의 글에서 제안된 기간은 1900~1960이다) 이전까지는 스웨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접대의 관습이 있었어야 한다. * (2) 이 시기 사생아의 문제나 아동-친모의 분리 문제가 광범위하고 문화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어야 한다. 또한 다음의 요건이 충족된다면 논의가 더욱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 (3) 접대의 관습이 존재하는 나라 중에는 이와 같은 아동-친모 분리의 문제를 경험한 국가가 없으면 논리를 보강할 수 있을 것이다. * (4) 당시 스웨덴에 사회복지체제나 경제적 번영이 없었음이 입증된다면 논리가 강화될 것이다. 여기서 각 요건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논의가 나올 수 있다. * (1) 19세기까지의 노르딕 지방의 접대 문화를 직접 다룬 사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19세기 당시 이 지역 극작가, 소설가가 남긴 작품 속 생활상이 정황 증거는 될 수 있고, 1840~1920년 기간에 대규모로 일어난 스웨덴인의 미국행 이민으로 형성된 공동체([[시카고]]의 경우 20세기 초 기준으로 스톡홀름 다음가는 규모의 스웨덴인 집성촌이었음)의 문화를 확인해봐도 간접적인 정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매일 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손님(랑크 박사)의 식사 여부를 몰라서 걱정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19세기 스웨덴 작가 칼 요나스 로베 알름크비스트(Carl Jonas Love Almqvist)의 "Sara Videbeck"에서도 여건이 어렵다는 이유로 손님인 목사에게 식사 대접을 하지 않는 집주인을 나무라면서 자신이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늙은 선장이 등장한다. 한편 [[스웨덴계 미국인]] 이민 공동체에서의 문화적 상황을 다룬 서술들([[https://libsysdigi.library.illinois.edu/OCA/Books2012-01/culturalheritage00ande/culturalheritage00ande.pdf|예시]])에서도 스웨덴 공동체가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주의적 생활을 했다는 묘사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다만 이 시점에도 이미 공동체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이 부분이 개척시대에 흔히 존재하는 외부자 공포인지, 스웨덴인의 특성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https://sahswi.org/2020/04/06/exploring-our-swedish-food-heritage/|다만 미네소타, 위스콘신 등의 스웨덴 이주자 협회 등에 남아있는 음식 유산에 대한 자료를 보면 ]] 외부인과 나누는 부분은 대체로 피카를 매개로 하며, 일상 식사를 외부인과 나누는 지적이 없는 점은 논거로서는 미흡하지만 정황으로서는 유념할만 하다고 보인다. [[https://annesofiebeckknudsen.com/wp-content/uploads/2021/09/thosewhostayed.pdf|일부 연구]]에서는 이 대이주시대(1840~1920)에 스웨덴에 남은 사람들은 이주한 사람에 비해 더 집단주의적인 면모가 강한 사람들이라는 지적도 있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집단주의적인 면모를 호혜적인 사회보험체계 등 복지체제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연구뿐 아니라, 스웨덴인의 개인주의적 면모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서 스웨덴 내부의 연구는 대체로 스웨덴인이 집단주의적/공동체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보이는데, 메타연구가 정확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확한 확인은 어려운 부분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볼 때 19세기에는 스웨덴에도 어느 정도 접대의 관습이 남아 있었으나, 이 시점에도 이미 세계 다른 지역에 상응할 정도의 접대의 관습은 없었을 개연성이 있다. * (2) 20세기 초엽의 위탁아동이나 사생아 비율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스웨덴 위키에서는 19세기 말 약 4만명의 위탁아동이 있었으며 이는 인구 1천명당 8명의 비율 이상임을 지적한다. [[https://sv.wikipedia.org/wiki/%C3%84nglamakerska|출처]]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978-3-030-61037-1_2|아울러 이 항목에서 논거로 자주 언급된 논문]]의 "Angelmaker"는 위탁아동을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연쇄살인범의 사례를 말하는데, 19세기 말 이와 같은 사례를 조사한 결과 160개 가구 중 6건을 확인했다고 한다. [[https://popularhistoria.se/samhalle/brott-straff/affarside-vanskotsel-och-barnamord-anglamakerskan|출처]] 이 항목에서 또한 주요 논거로 사용되는 "Illegitimacy and Lone-Parenthood in XIXth Century Sweden"에서 19세기 혼외자 비중이 1811년~1820년에는 출생 1000명당 62명, 1851년~1860년에는 출생 1000명당 90명, 1900년에는 출생 1000명당 110명이라 추산하고 있다. [[https://www.persee.fr/doc/adh_0066-2062_1999_num_1998_2_1938|출처]] 이를 토대로 볼 때 존재했던 문제였던 것은 확실하고, 사회적으로는 상당한 이슈였을 개연성이 있으나, 세대 문화 상실을 야기할 만큼 광범위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있다. * (3) 또한 이 항목의 역사에서 자주 반대 논거로 언급된 논문에서도 '이와 같은 아이 위탁은 영국, 미국, 뉴질랜드, 호주, 덴마크, 스웨덴에서 나타난 관행'이었다. 이 문제는 사실 비슷한 시기 서구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현상이었고 스웨덴 만의 일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 (4) 스웨덴은 1850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은 바로 이 시기부터 이륙을 시작했고, 계속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1850-1970 기간으로 볼 때 스웨덴보다 평균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 산업화는 이미 1890년대에 상당 궤도에 올랐으며, 1900년이 되었을 때 이미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었다. 1920년대에 급격한 산업혁명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후(1921~1923년) 스웨덴이 심각한 고통을 겪은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이것은 전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도 스웨덴에 상당한 고통을 주었으나, 스웨덴은 환율가치 조정으로 수출이 상당 규모 증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쉽게 지나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 시기가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는 계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https://www.ekonomifakta.se/en/Swedish-economic-history/swedish-economic-history2/From-War-to-the-Swedish-Model/|스웨덴 경총 서술]]) 한편, 1938년 7월 11일자 미국 [[라이프]]지의 [[https://books.google.co.kr/books?id=f08EAAAAMBAJ&pg=PA31&redir_esc=y#v=onepage&q&f=false|스웨덴 구스타프 왕 80세 생일 기사]]에서도 스웨덴이 전쟁(1차대전) 이후 매우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으며, 아동노동 금지 등 높은 규율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서는 당대 스웨덴에 전기 확산(약 75%의 가구와 60%의 농가) 수준이나, 이미 도입되어 활용되고 있는 실업자 고용지원제도,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 제도 등을 서술하고, 독점방지 등 제도가 운영 중인 점 등을 짚어 생활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빈민가가 없다시피 한데 그 이유가 스톡홀름의 주택 공급 가격이 세계 최저수준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최소한 스톡홀름에 한해서라도 1938년 시점에는 이미 서민 경제상황이 억압적인 수준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유럽 각국의 역사적 GDP 곡선을 보더라도, 이 시기 스웨덴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결정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볼만한 변화를 찾아보긴 어렵다. 요약하면 근현대사적 관점으로 분석한다고 해도 일부 유럽 지역에서만 접대에 박한 것을 완벽히 설명할 순 없다. 각 나라의 근현대사적 비극에 줄을 세울 순 없겠지만 스웨덴 정도면 현대 국가 기준으로는 선구적인 복지정책과 높은 국민소득, 그러면서도 제국주의적 행보는 보이지 않았던 덕분에 세계적으로 볼 때 매우 양호한 근현대사를 지닌 나라이다. 유럽 기준으로 봐도 구 유고슬라비아권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처럼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겪은 나라들은 수두록하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도 양차 세계 대전으로 수백만이 죽어나갔던 것에 비하면 스웨덴은 박쥐 같다 해도 대규모 인명손실은 겪지는 않았는데[* 당장 근대화 도중 [[중진국 함정]]에 빠진 국가들에서도 접대의 관습이 뒤틀릴 지언정 남아 있으며, 한국만 하더라도 근현대에 온갖 비극을 다 겪었지만 기성세대들은 심심하면 '''"못 살고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이 오히려 이웃간에 정이 넘쳤다"'''라며 한탄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들 나라에서도 대개 특정 계층에서만 영향이 발생하는 등 접대가 간략해지는 정도로 그쳤다. 따라서 스웨덴의 근현대사적 요소 때문에 접대 관습 자체가 한 세대에서 일제히 증발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단정짓기엔 근거가 부족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