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카페이스(1983) (문단 편집) == 기타 == [[스카페이스(1932)|1932년 영화]]와는 주인공부터 시작해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1932년 영화는 [[알 카포네]]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경도 [[시카고]]이다. 1932년 영화가 범죄 영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면, 이 영화는 알 파치노의 전 출연작 대부의 뒤를 잇는 범죄 영화의 완성형으로 평가받는다. 여러모로 1980년대 범죄 영화의 상징격인 전설적 영화. 물론 대부보다야 덜하지만 이 영화가 범죄 영화라는 장르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며, 당대 논란이 될 정도로 극단적인 수위를 자랑했지만 흥행에도 성공한다. 초반 전기톱으로 앙헬을 살해하는 장면이 조금 잔인한데, 이 장면도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다음 그의 얼굴에 피가 튀기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이라 직접적으로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배우들의 등용문이 된 영화다. 엘비라 역의 미셸 파이퍼는 이후 1980년대 후반 최고의 스타로 성장했고, 오마르 역의 [[F. 머레이 에이브러햄]]은 다음해 [[아마데우스(영화)|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로 미친 연기를 선보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나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도 1980년대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출연한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언급하기를, 촬영장에서 각본을 집필한 [[올리버 스톤]]와의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올리버 스톤은 드 팔마의 작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배우들에게 있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의견으로 혼란이 갈 것을 염려해 드 팔마가 스톤을 세트장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또한 올리버 스톤은 집필 당시 마약 중독으로 고생하였다고 한다. 드 팔마 이전에 [[시드니 루멧]]이 연출자로 고려됐다. 루멧과 제작자 마틴 브레그먼, 알 파치노는 1973년 영화 <[[형사 서피코]]>와 1975년 <[[뜨거운 오후]]>에서 이미 함께 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의 마약으로 점철된 초기 각본을 보자 루멧은 상당히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루멧은 마약과 연결해 정치적인 드라마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싶어했다고. 결국 이러한 시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차 후 루멧이 연출한 영화가 폴 뉴먼 주연의 1982년 <심판>(The Verdict)이다. 마리엘 항구에서 온 이민자라는 주인공의 이력은 루멧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인트로의 쿠바 망명자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망명이 아닌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공산주의 체제에 반기를 든 쿠바의 범죄자들을 미국으로 몽땅 떠넘긴 것이다. 쉽게 말해 강제 이주라고 볼 수 있다. 12만 5000여명이 미국 플로리다 주로 향했는데 그 중 5분의 1, 즉 25,000여명이 전과자들이라고 알려준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과 범죄자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느니 미국으로 가게 내버려둬 쿠바에는 안정과 인권을 존중한다는 국제 사회의 찬사를, 미국에는 혼란을 안겨주자는 생각으로 시행한 정책이다. 어차피 쿠바에 있어봐야 반정부 세력만 키워줄 뿐이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두는 것. 대표적으로 1980년 4월의 마리엘 항 사건이 있으며, 1990년대 쿠바의 경제가 소련 붕괴와 미국의 제재로 혼란에 빠졌을 때도 이런 식으로 반정부 세력이 될만한 사람들을 미국으로 내보냈다. 그래서 쿠바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이 많은 것이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헥터 살라만카]] 역으로 유명한 마크 마골리스가 토니의 총에 맞고 죽는 역할로 나와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https://youtu.be/ZcQtUdZ5Af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