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칸데르베그 (문단 편집) ===== 1455, 베라트 공방전의 실패: 위기 ===== 레저 동맹에 위기가 닥친 것은 1455년 베라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였다. 베라트는 남부 알바니아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요충지로, [[오스만 제국]]의 공작[* 당시 베라트를 통치하던 알바니아의 지방 귀족이 병사하면서 스컨데르베우에게 도시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걸 넘겨받는 과정에서 방어가 일시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간파한 오스만 제국이 군대를 보내 꿀꺽한 것.]으로 이 도시가 오스만의 것이 되자, 이를 탈환하기 위해 레저 동맹군이 아라곤에서 지원한 포병과 함께 이 도시를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한 것. 오스만 제국은 이 도시가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자 바로 2만에 달하는 지원군을 보냈고, 스컨데르베우는 이 군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베라트 탈환에는 실패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는 레저 동맹에 가담했던 알바니아 영주들을 흔들었고, 가장 스컨데르베우의 신뢰를 받던 인물인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 심지어 그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까지도 오스만 제국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알바니아를 공격하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알바니아의 독립은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며 이 이상의 저항은 오히려 알바니아에 해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나름 애국자였던 셈이지만 [[메흐메트 2세]]는 그를 이용하고 버릴 작정이었으며, 모이시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알바니아군에게 또다시 박살나게 된다. 이에 모이시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하여 다시 알바니아로 돌아오지만, 스컨데르베우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추후에 그를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부른다면 엄벌에 처하겠노라고 공포했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스컨데르베우를 배반하지 않았으며, 1464년에 오스만군에 포로로 잡힐 때까지 알바니아의 편에서 싸웠다. 한편 스컨데르베우의 조카였던 '함자 카스트리오티'는 아들이 없는 삼촌이 죽으면 알바니아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1454년에 스컨데르베우가 아들인 존 2세를 낳은 것이 불만이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배신한 것이다. 이후 그는 1457년의 알불레나 전투에서 스컨데르베우와 싸웠지만 포로로 잡혔고,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는지 나폴리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하지만 이후 풀려나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고, 고위 지휘관으로 살다 죽었다. 행적을 보면 이뭐병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지만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기에,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그의 배반을 아쉬워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