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칸데르베그 (문단 편집) ===== 1457 ~ 1462, 알불레나(우여바르다) 전투: 최대의 승리와 휴전 ===== 그러나 얼마 안가 1457년, 알불레나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 그의 조카와 측근들까지 투항하자 이를 기회로 여긴 오스만 제국은 5만에서 8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알바니아로 진격시켰고, 게릴라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움직였으나 스컨데르베우는 이 군대에 대해 기습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과 군대의 위치를 완벽하게 숨겨 오스만 제국군으로 하여금 그가 알바니아를 포기하고 도망갔다고 여기게 만든 후 주둔지에 전 병력을 동원한 기습을 가해 오스만 군대의 반을 날려버리는 대성과를 거둔 것(전사, 포로 도합 3만여). 기습이 성공하는 그 순간까지 오스만군은 스칸데르베르가 알바니아에서 도망친 줄 알았다고. 스컨데르베우의 조카인 함자 카스트리오티가 포로로 잡힌 전투가 바로 이 전투다. 바로 전해에 벌어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뒤이어 다시 한번 당한 이 참패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큰 피해였다. 거기다 이 소식에 호응하여 남부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대대적인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3년 동안의 휴전협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불레나 전투는 오늘날 우여바르다 전투라고도 하는데, '스컨데르베우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프란츠 바빙거)'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먼저 교황령과 나폴리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전투 이후 스컨데르베우를 배신한 사람은 아예 없거나, 몇 명에 불과했으리라고 추정된다는 것. 이후 오스만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 스컨데르베우는 후원자인 아라곤 왕국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아라곤 왕국이 앙주 세력과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분쟁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에 대향하기 위해 레저 동맹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공격이 재차 시작되는 1462년때까지가 사실상 스컨데르베우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이 [[왈라키아 공국]]에서는 [[블라드 3세]]의 2차 집권중 [[오스만 제국]]의 사절을 죽임으로서 전쟁을 건 시기(1459)이다. 이후, 1462년 [[블라드 3세]]는 전투에서 패해 [[헝가리 왕국]]으로 도망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