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칸데르베그 (문단 편집) == 기타 == 알바니아인들의 스컨데르베우 존경은 현대에도 이어져 오늘날,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이 있고[* 동상은 원래 엔베르 호자의 동상이었는데 호자 사망 후에 부숴버리고 스컨데르베우의 동상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알바니아의 국기는 아예 스컨데르베우의 가문인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가문 문양'''인 검은 독수리에서 비롯되었다. 사실상 '''알바니아라는 국가의 정체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정도의 인물. 또한 스칸데르베우에 대한 평가는 알바니아 국외에서도 호평이 자자한데, 많은 사학자들이 스컨데르베우의 군사적 능력을 그중에서도 방어전 능력에 있어서는 역사상 손꼽을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주로 비견되는 명장들은 나폴레옹에 맞서 승리한 [[아서 웰즐리]], 소련군의 반격을 막다 못해 역으로 반격에 나서고 성공한 [[발터 모델]]이 있다.[* 아서 웰즐리나 발터 모델도 스컨데르베우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막강한 상대나 다수의 병력들을 상대로 뛰어난 방어 전술을 펼쳤지만 스컨데르베우만큼 열악하진 않았다. 일단 아서 웰즐리는 프랑스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할 뿐이지 경제대국 영국의 지원과 동맹국의 군대를 거느려 프랑스군 바로 다음가는 군을 지휘했고, 모델도 병력 수는 모자라도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독일군을 지휘했지만, 스컨데르베우는 카눈이라는 명예살인 관습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반목이 매우 심한 축에 속해 단합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한 알바니아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그렇게 뭉친 사람들을 모아서 오스만 최고의 정복왕인 메흐메트 2세를 상대로 25년이나 맞서서 독립을 지켜내는 등 괜히 알바니아인들이 그를 민족 정체성으로 받드는 게 아니다.] 스컨데르베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던 오스만 제국의 팽창기에 이에 대항한 여러 민족영웅들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오랫동안 성공적인 투쟁을 이끌어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블라드 3세]]는 고작 6년이었고, [[후녀디 야노시]]는 동유럽에서 손꼽히는 강국 헝가리의 섭정이었으나 본격적으로 대항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 1456년 베오그라드 전투 직후 역병으로 사망. 대신 그 아들로 헝가리의 왕이 된 [[마차시 1세]]가 뒤를 이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항쟁을 이끌었으며, 그 결과 오스만은 마차시가 죽고 헝가리가 스스로 무너진 뒤인 1526년에야 헝가리에 [[모하치 전투]]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그리고 이건 훗날 [[빈 포위]]라는 거한 삽을 두 차례나 뜨면서 기독교 측이나, 오스만 쪽이나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헝가리 중부 평원을 끝으로 오스만 제국의 안 그래도 전근대 국가치고 엄청나게 넓고 길었던 병참, 보급선은 결국 더 멀리 뻗어 나가는 데 실패한다. 당장 헝가리 평원 넘어 [[알프스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이 만나는 지점은 동계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출발 시점을 이스탄불로 잡는다면 늦어도 초여름에는 출정을 해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빈 현관문이라도 두들겨 볼 수 있는데, 헝가리 평원은 가을을 기점으로 본격 우기가 시작되어 러시아의 [[라스푸티차]] 못지 않은 엄청난 자연 방어막이 형성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스 11세]] 역시 유명하기로는 이루 말할 데가 없지만 장기간 버텨내지 못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곧 '''스컨데르베우는 매우 제한적인 힘만으로 무려 25년을 버텨내었으며 때로는 성공적인 공세까지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스컨데르베우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력의 투사로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이러한 명성, 군사적 성과, 외교적 능력을 활용해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솜씨도 뛰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날 알바니아의 민족의식 자체를 일깨우고[* 이전까지 알바니아 역사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알바니아 전체가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컨데르베우는 25년 동안이나마 알바니아인 전체를 한데 모으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알바니아의 국기가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 그 이유다.] 알바니아인이라는 존재를 형성시킨 인물 중 하나로 추앙받는다. 스컨데르베우의 투쟁은 알바니아인의 정체성이자 국가 통일, 자유, 독립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는 알바니아의 많은 전설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근대 알바니아의 최초이자 유일한 국왕인 [[조구 1세]]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아들 존 2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가게된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후손 대다수는 [[http://www.castriotascanderbeg.it/|이탈리아에 거주중이다.]] 스컨데르베우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그의 전설적인 무용도 포함되어 있다. 메흐메트 2세로부터 받은 마법의 힘이 담긴 검과 존재만으로도 상대 말을 겁먹게 하는 ~~ 키높이 효과도 있다고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말을 지닌 그는 언제나 전투에 앞장섰고 그의 칼 아래 평생 3천에 달하는 오스만 군인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평생 하루 5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고 그의 검을 딱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2명의 적을 철 투구째 베어버렸다고 하며 야생 곰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죽이고 다음 공격 한 번에 야생 버펄로를 베어버렸다는 등의 무용담이 전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무용담은 이런 류의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여겨질 정도로 무패의 지휘관[* 실제로 오스만에 맞선 그의 통산 성적은 21전 19승 2패에 달하며, 그 두 번도 전투가 여러 날씩 길어지자 스컨데르베우가 도중에 다른 일을 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패배한 경우다. 즉 전투를 확실히 마무리짓지 않고 자리를 뜬 것도 어쨌든 진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패한 적은 없다.]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스컨데르베우의 활약상은 오스만 제국군마저 감복시켜서, 알바니아를 정복한 후 오스만 제국 병사들은 그가 묻힌 교회로 가서 그의 뼈를 서로 나눠서 부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잠깐 근데 이거 [[부관참시]]...~~ 또한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은 후대에도 널리 추앙받아,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과 싸워 이겨낸 탁월한 지휘관으로 칭송받았다 [* 가령 [[퀘벡]]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18세기 영국의 지휘관 제임스 울프의 경우, '소규모 방어군을 지휘하는 데에는 고금을 통틀어 모든 지휘관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라고 평했다.]. 스컨데르베우의 초상이나 동상 가운데 투구를 쓴 모습을 보면 투구에 염소 머리 비슷한 것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건 정말로 염소가 맞다. 이는 1450년의 1차 크루여 공방전 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오스만군을 기습 공격하던 와중에 한 번은 밤중에 염소 한 무리를 오스만 군 진영으로 달리게 한 것. 그리고 그 염소들은 저마다 뿔에 등불을 매달고 있었고, 당연히 알바니아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고 있던 오스만군은 그쪽으로 몰려들었고 작전은 제대로 통했다. 스컨데르베우 스스로도 염소 작전은 기발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자신이 쓸 투구를 새로 제작하며 염소 머리 장식을 덧붙였고, 그의 투구라고 전해지는 물건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단 알바니아가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의 황실 무기박물관에 있다는 건 함정. 염소투구와 함께 스칸데베르그의 검 또한 전시되어 있다.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가족을 비롯해 알바니아 저항군을 지휘했던 귀족들과 오스만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나폴리 왕국]]으로 피신해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알버레셔인(Arbëreshë people)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덕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도로 표지판에 이탈리아어와 알바니아 어가 병기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한다. 이후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은 나폴리 왕국의 귀족으로 대를 이어갔고, 오늘날의 알바니아 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에도 참가했다. 스컨데르베우는 16, 17세기 발칸 반도와 유럽의 각종 문학에도 종종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볼테르가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언급한 적도 있고 [[안토니오 비발디]]와 안토니오 살비가 제작한 오페라 스칸데르베그(1718년 상연)에서도 등장하는 등 이후에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알바니아의 스컨데르베우와 가장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한국의 [[이순신]]과 [[곽재우]]나 대만의 [[정성공]]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거나, 해당 국가들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만큼 알바니아에서 영웅이었기에 위에 서술한 대로 [[조구 1세]]가 후손이라고 뻥을 치며 선전했고[* 마침 [[조구 1세]]도 [[알바니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인물이라서, 스컨데르베우 다음으로 [[알바니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국민적 영웅이다. 그가 실제 스컨데르베우의 후손이건 아니건 간에, 알바니아인들 앞에서 이걸 걸고 넘어졌다간 싸움이 날 정도니 말이다.], 심지어 독재자인 [[엔베르 호자]]도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높이 칭송했을 정도[* 스컨데르베우 자체가 봉건 귀족으로 사회주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 시절 지폐 도안으로도 쓰였으며, 현 [[알바니아 레크|알바니아 5000레크]] 지폐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그가 항상 대동하고 다니면서 게릴라 전술로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던 '스트라디오트'(Stradiot)라는 기병대도 유명하다. 이 기병대는 본고장인 알바니아에서도 활동했지만 [[베네치아]]로 가서 용병 노릇도 했다.[* [[토탈 워: 미디블2]]에서 베니스가 스트라티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