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칸데르베그 (문단 편집) ===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1423(19세)~1443(39세), 21년간) === 제르지는 [[데브시르메]] 제도에 의해 징집되어 1415년(11세)부터 1423년(19세)까지 9년간 당시 오스만의 수도였던 [[에디르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오스만 술탄국의 왕립학교[* 오스만 술탄국 내궁(엔데룬, Enderun)에 부속되어 있는 교육기관, 역사상 최초의 영재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데브시르메 제도 하에서 뽑힌 소년 중 엔데룬으로 들어가는 부류는 상당히 우수한 인재로 여겨진다. [[예니체리]]도 이쪽에서 나온다.]에서 교육을 받았고, 최소 3년 이상의 군사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그에 대한 기록은 알바니아 지역의 몇몇 법령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엔데룬에서의 교육을 마친 그에게 오스만 술탄국은 그의 아버지 영지 인근의 티마르(영지)를 수여했다. 그의 아버지, 존 카스트리오티(Gjon Kastrioti)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이자 동시에 [[베네치아 공화국]] 등 근방의 기독교 세력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엔데룬에서 교육받은 제르지가 바로 근처의 티마르를 수여받아 부임했다는 것이, 존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빼앗아 오스만 술탄국의 교육을 받은 제르지에게 주어진 티마르에 이를 합치겠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존 카스트리오티는 오스만의 지사와 싸우다 패해 영지가 줄거나, 친척들과 오스만에 반하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에 제르지는 오스만의 충실한 신하로 남았다. 그래서 몰수된 가문의 영지가 제르지에게 수여되기도 했으며, 1437년에서 1438년 사이에는 알바니아 지역의 지방관([[튀르키예어]]로 subaşi라고 한다)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충실하고 능력있는 오스만 술탄국의 신하였으며, 그가 지방관 직무를 다한 1438년에는 그의 아버지 영지를 포함하는 더 큰 티마르(영지)가 수여되기도 하였다. 무라트 2세가 그에게 태수('베이')직을 수여하면서 그의 유명한 별명 '스컨데르베우'를 얻게 해주었고, 이때 그는 5천에 달하는 기병과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대영주가 되어 있었다. 1437년 부친 존 카스트리오티의 사망 이후 그는 아버지의 남은 영지와 함께 카스트리오티 가문이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있었던 도시국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멸망했다.]과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도 계승했다. 이후에도 한동안 그는 오스만 술탄국의 충실한 신하이자 1443년까지 오스만 술탄국의 주요 장수 중 한명으로 [[후녀디 야노시]](1407 ~ 1456)의 지휘 하의 기독교 세력과 맞서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가문 계승과 그로 인한 가문원 및 주변 세력과의 교류가 1444년 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