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스푸트니크 (문단 편집) == [[스푸트니크 쇼크|후폭풍]]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스푸트니크 쇼크)] >'''Now, somehow, in some way, the sky seemed almost alien.''' >'''지금, 왠지, 어떤 면에서인지, 하늘이 아주 낯설어 보였다.''' >---- >[[린든 B. 존슨]]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을 듣고 난 직후. [[https://www.darpa.mil/about-us/timeline/creation-of-darpa|출처]] 이 위성이 발사되었던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고 불리던 준 전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스푸트니크 발사 후 패닉에 빠졌다. 자신들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던 조국 미국이 세계 최고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국력]] 자체는 [[소련]]은 미국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미국 국민들이 느꼈다는 국력은 단순히 [[대공황]] 당시처럼 자국 내의 정치/경제적인 불만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뒤바꿀 계획을 경쟁국이 더 빨리 성공시켰다는 것에서 기술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차이가 국가 비전의 차이로까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거기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소련이 우주에 인공위성을 올릴 수 있다면 거기서 [[핵무기]]를 우리 머리 위에 떨어트릴 수도 있지 않은가?"'''가 그 이유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꼼짝도 못 하고 소련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실현시킨 병기가 바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A로켓의 원형인 [[R-7]] 또한 원래 ICBM 용도로 제작된 발사체였다.] 스푸트니크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충격을 받고 2개의 국가 기구를 신설하라고 지시했는데 이 기관들이 그 유명한 '''[[DARPA]]'''[*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만든 곳이다.]와 '''[[NASA]]'''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 미국은 다시 한 번 패닉에 빠졌는데 소련이 세계 최초로 우주로 생명체를 보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게 사람이 아니고 개([[라이카(개)|라이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소련과 미국의 기술력 차이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군]]은 더이상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밀릴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대대적으로 로켓 개발 사업을 재추진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은 [[뱅가드 위성|뱅가드]] 로켓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켜 그해 12월 6일에 [[http://en.wikipedia.org/wiki/Vanguard_TV3|뱅가드 TV3]]을 발사했지만 '''[[폭발 엔딩|로켓은 1m도 못 올라가고 발사대에서 폭발했다.]]''' 원인은 추진 체계였는데 탱크 및 인젝터의 낮은 압력 때문에 연소실의 고온 가스가 인젝터를 통해 연료 시스템으로 새어들어간 것이었다. 이 장면은 [[https://youtu.be/ZvnKfgDANKY?t=27|TV로 생중계]]되었고 4초만에 로켓이 폭발하는 걸 전 세계에 자랑하고 만 미국은 [[나라 망신|대굴욕을 맛보았다.]] 뱅가드 인공위성은 회수되었지만 재사용은 불가능했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하필 사고에 휘말렸던 뱅가드 TV3가 스푸트니크와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뱅가드의 실패를 두고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끝장난 니크(Failnik)!"라고 미국을 깠다. 미국 언론도 고장난[* Kaput는 Kaputt라는 [[독일어]]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고장났다는 뜻이다.]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카푸트니크(Kaputnik)[* [[영어 위키백과]]에서 Kaputnik라고 검색하면 뱅가드 TV3으로 곧바로 리다이렉트된다.], 자빠진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플롭니크(Flopnik), 영어로 "앗, 이런"을 뜻하는 "Oops"가 들어간 웁스니크(Oopsnik), 땅에 주저앉은 스푸트니크라는 뜻의 스테이푸트니크(Stayputnik)[* 이것은 훗날 2015년 KSP 게임의 무인 조종 모듈로 등장했다.] 등의 별명을 붙이면서 엄청나게 조롱했고 전 세계가 미국을 비웃었다. 뱅가드가 폭발하고 며칠이 지난 후 '''소련은 공식적으로 '조문'을 보냈다'''. 무인 로켓이라 죽은 사람도 없으니 당연히 '''놀리려고''' 보낸 조문이었고 실제 조문에는 흐루쇼프가 쓴 "뱅가드(전위부대)라고 부르지 말고 리어가드(후방부대)로 부르는게 좋겠다"는 통렬한 조롱까지 실려 있었다. 미국은 귀를 틀어막고 뱅가드 TV3 BU(Backup)의 발사를 준비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 2월 5일 '''두 번째의 뱅가드 로켓도 점화한지 57초만에 폭발했다.''' 다행히 무인 인공위성 로켓이라 사상자는 없었고 3월 17일 3번째 발사는 성공했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이미 박살나 버렸다. 이후에도 해군의 뱅가드 로켓은 11번의 발사 시도 가운데 8번이 실패하면서 미국의 자존심을 벅벅 긁어 놓았다. 결국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등 [[나치 독일]]에서 [[페이퍼클립 작전|회유한 전범 과학자]]들에게까지 로켓 개발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뱅가드가 터지는 사이 브라운 박사와 미 육군은 주피터C 로켓을 개발해 1958년 1월 31일 제트 추진 연구소(JPL)가 만든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쏘아올려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익스플로러 1호가 지구 밖에 있는 방사선 띠인 [[밴 앨런대]]를 발견하는 등의 학문적인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뱅가드 로켓의 실패로 미국의 자존심은 아주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고 로켓 기술의 격차 역시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더불어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무게도 문제였는데 소련은 최초로 발사한 스푸트니크 1호조차도 80kg은 넘었고 1958년 5월 15일에 발사된 스푸트니크 3호가 '''1,327kg'''인 데 반해 미국이 같은 해 7월 26일에 쏘아올린 익스플로러 4호는 '''25.50kg''', 뱅가드는 겨우 2kg에 불과했다. 흐루쇼프가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 소식을 듣고 스푸트니크와 비교하면서 '''"작은 [[오렌지]]만하군"''' 하며 비웃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 게다가 이 무게 차이는 단순 자존심 문제를 넘어 미국이 환장할 수 밖에 없는 문제도 있었는데 핵무기에 사용되는 방사능 물질은 [[임계질량|어느정도 이상의 질량을 넘겨야]] 터지기 때문에 핵탄두는 무게가 나갈 수 밖에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만들어진 핵무기들조차도 기본적으로 톤 단위는 나갈 정도. 그런데 소련은 1톤이 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미국은 못했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미국에 핵폭탄을 떨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 미국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에 이어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보스토크 계획]]을 추진해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고 귀환까지 성공하여 미국을 더더욱 엿먹였다. 이후 미국은 국가적 수치를 씻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고 이 계획이 성공해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까지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며 미소 간의 우주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최초의 달 탐사용 무인 로버(월면차) 루노호트(1호(루나-17), 2호(루나-21))를 두 대나 성공시켜 또 엿을 먹였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이미 먼저 '''[[아폴로 11호|유인 달 착륙]]'''을 성공시킨 후라 타격은 그리 크지 못했다. 오히려 이때는 소련이 [[역관광]]을 당하고 난 뒤라 소련 측이 애가 탔을 듯. 그리고 이후 약 50년간 '''[[인류]]는 [[우주 경쟁|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가장 빠르고 무지막지한 기술의 혁신 시대를 맞이했다.]]''' 또 이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 교육에 대한 비난 및 자성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동안 환영받던 진보주의자들 대신 본질주의 학파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상 자성 수준이 아니라 그간의 패러다임이 싹 물갈이당했다. 이 과정에서 [[랠프 타일러]]를 비롯해 [[존 듀이]]조차 신뢰받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hani.co.kr/webtutor/87056|출처]] 이런 경향에 [[조셉 슈왑]]은 "교육과정학 분야는 죽어가고 있다."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학문중심 교육과정. 1959년 9월 미국에서 우즈홀 회의(Woods Hole Conference)가 열리면서 기존 교육계에 대한 반성 및 대안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기존의 교육학자(교사 +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은 찍소리도 못하거나 아예 초청받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우즈홀 회의에는 총 34명의 학자들이 모였는데 그 34명 중 교육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교육학자들이 만든 교육 때문인데 어디서 교육학자가 끼냐는 것이 당시의 논리였다. 교육학자들은 나름대로 항변해 봤지만 여론은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몇몇 이들은 아예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만큼 미국 교육계에 준 쇼크가 대단했다. 미국 [[교과서]]에 [[진화론]]이 다시 등장했고 [[1967년]]에는 테네시 의회까지 반진화론 법을 폐기했다.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한다. 또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은 미국 [[DARPA]]에서 인터넷의 전신인 알파넷을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