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승정원 (문단 편집) == 승지 진급 사례 == 승지 이동이 잦은 경우라면 도승지가 정3품 당상 통정대부 자급이겠지만, 인사이동이 늦어지면 통정대부 자급을 뛰어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행 도승지(行 都承旨)가 된다. 성종조의 김승경(金升卿)의 승지임명 사례를 보면 임명일자가 몇몇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2년 2달만에 동부승지에서 도승지로 진급했다. 다른 승지들도 앞서서/뒤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순으로 진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좌부승지 손비장이 우승지 홍귀달로 바뀐 건 예외. 또 성종조에는 세조조부터 이어온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다. 그런게 이렇게 등용된 사림이 임금을 막상 너무 꼿꼿하게 대하자 이에 진저리를 느낀 것. 그래서 무인 출신을 승지로 임명한 사례도 있었다. 단 승지들이 당연히 겸직하던 경연관이나 춘추관 관직은 맡지 못하게 했다. 이를 '무승지'라고 해 당시 정계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모양. 이후 성종은 무승지를 시작으로 무인의 문관직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지만 문신들의 눈치를 보던 무신들의 소극적 움직임으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후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에서 무승지의 필요성이 강조되긴 했지만 성종 이후 시대에서 무승지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고... 또 중종 17년(1522) 2월 6일에 어떤 사건으로 승지 6명을 동시에 파직을 시킨 사례도 있었는데 이는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702006_004|#]] 이로 인해 일을 대신하기 위해 지중추부사(종2품) 윤은필과 장례원판사(정3품 당하) 최세절을 급히 가승지로 임명한 일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702006_005|#]] 이후 이 두 명은 승지인사가 정식발표 할 때 우승지와 우부승지에 제수됐다고... 보통 승지는 동부승지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는게 관례인데 이례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8017_005|성종 8년 8월 17일 동부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08026_007|성종 8년 8월 26일 우부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4030_005|성종 9년 4월 30일 좌부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09006_003|성종 9년 9월 6일 우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911014_002|성종 9년 11월 14일 좌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10025_005|성종 10년 10월 25일 도승지]]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08025_003|성종 12년 8월 25일 가선대부 행 도승지]] [[분류:조선의 통치 기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