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경 (문단 편집) === 역사 === 본디 [[주나라]]에서 쓰이던 많은 노래들 3000편을 [[공자]]가 산삭(刪削, 깎고 삭제함.)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유교에서 중요한 경전으로 대우를 받다가 [[진나라]] 대에 벌어진 [[분서갱유]]로 모든 유교 서적이 불태워질 때 함께 소실되었다. 그러다가 [[한나라]] 대에 유교가 국가의 사상으로 숭상받으면서 오경박사를 두어 [[훈고학]]을 통해 유교 서적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시경 또한 다른 경전들과 함께 복원이 시도되었고, 그 결과문이 삼가시(三家詩)다. 삼가시란 제(齊)의 원고생(轅固生)에 의해 전해진 제시(齊詩), 노(魯)의 신배(申培)에 의해 전해진 노시(魯詩), 한영(韓嬰)에 의해 전해진 한시(韓詩)의 세 학파에 의해 탄생한 시경으로, 이 삼가시를 금문경이라 부른다. 삼가시는 전한대에 노공왕이 공자의 집을 철거하다가 시경의 원문인 죽간본인 고문경을 발견할 때까지 시경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고문경이 발굴되고, 이에 주석을 단 모시(毛詩)가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삼가시는 그 명맥이 단절되었고, 후한-동진의 혼란기에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한시의 외전 10권만이 전해지고[* 원전 22권의 경우 송나라가 고려에게 그 책이 있으면 전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다. 시경의 존재에 대해 말한 가장 오래된 기록.], 삼가시 원문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시경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 이 과정에서 [[상서|서경]]의 경우, 원문이 발견되지 못하고, 전한대의 금문상서에 진나라 시대의 위작인 위고문상서가 등장하여 그 내용이 섞여서 원전의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가치를 많이 잃어버지만, 위고문상서가 후대의 유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칭화대학에서 죽간으로 적힌 서경의 10여 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악경의 경우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조차 되지 못하여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에, [[송나라]] 대에 주희가 주석을 단 집전(集傳)까지 더해져, 이후 시경은 고문경에 모장과 모형, 주자의 주석이 달린 채로 전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