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나노(항공모함) (문단 편집) === 건조과정에서의 각종 잡음 === 항공모함으로 개조가 결정된 후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당장 1943년 7월 구축함과 잠수함 및 전시수송선 건조에 집중한다는 방침으로 인해 다시 건조가 취소되었다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함으로서 악화되어 가는 전황으로 인해 다시 건조가 속행되면서 작업을 서둘렀다. 일단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1944년 7월 1일에 군함 시나노라고 명명되며 항공모함으로 등록된다. 동시에 1944년 10월 15일까지 준공시키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이 떨어진다. 여기에 더해서 1회 전투에 참가할 때 필요한 설비만 우선 완성시키고 전투에 참여한 다음에 귀환에 성공하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한다는 방침까지 정해졌다. 당시 군령부가 요코스카 해공 공창장에게 명령한 내용을 해군 조선 기술 개요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 거주설비는 사관실부터 병원에 이르기까지 간소하게 하여 최소한의 것으로 한다. * 사무창고 이외의 창고설비도 최대한 간단하게 한다. * 전투시 화재를 막기 위해 목재 부분을 최대한 적게 한다. * 방독 구획의 기밀 시험을 생략한다. * 중갑판 이상의 구획의 기밀 시험을 생략한다. * 기계시설공사나 병기관련 공사도 가능한 한 미룬다. * 공기 목표, 10월 5일 도크 내부에 해수 주입. 10월 8일, 진수식 후 앞 바다에 계류. 10월 15일, 준공. * 주변현의 조선소에서 작업원을 빌리고 해군 공작 학교로부터의 도움 받는다. 당시의 요코스카 공창은 각종 함선의 건조 및 수리로 인해 작업원 4,000명을 증원해도 바빠서 난리인 판국에 다이호의 손실을 보충한다는 이유하에 건조공사 기간을 점점 단축해서 5개월 가까이나 줄였으며 진수 후 취역까지의 기간도 야마토급 전함 2번함인 무사시가 19개월이 걸렸는데 그걸 3개월 안에 하겠다는 무리수까지 작렬했다. 설상가상으로 작업원 확보도 힘들었다. 그래서 민간 조선소의 작업원이나 해군공기학교의 학생을 모은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전시대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배를 만드는 조선과는 전혀 관련없는 학교나 학과의 학생도 투입하고, 한국인이나 대만인도 투입했으며 심지어 여성 정신대도 투입해서 작업을 진행시켰기에 말 그대로 공사는 날림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과로와 사고로 간부급 인원 10여명이 순직할 정도였다. 그래서 예정대로라면 1945년 2월에나 완성하려 했던걸 1944년 10월 8일에 진수했다. [[진수식]]에서도 사고가 발생했는데 원래는 10월 6일에 하기로 하고 그 전날인 10월 5일에 시나노 현장 사무소를 철거하면서 동시에 도크에 바닷물을 넣는 주수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도크에 물을 절반 정도 넣고 배를 일단 도크 안에 넣은 상태로 물 위에 띄운 다음에 균형이 맞는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원래 목표인 10m 수심 까지 바닷물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8m 수심이 달성되었을 때 도크의 입구가 약간 열리면서 대량의 해수가 도크 내로 급격하게 유입되었고, 강력한 물결로 인해 배를 묶어놓은 밧줄이 끊어지고 갑판에 있던 기술사관과 작업원이 바다로 추락하고 함수 하부의 구상선수 및 그 내부의 소나등이 도크와의 격돌로 파손되었다. 도크에 물을 집어넣으면서 도크 입구를 막는 구조물에 달린 밸러스트 탱크에도 동시에 조금씩 물을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우 기초적인 실수인데 이걸 파악못할 정도로 당시의 요코스카 공창의 상황이 심각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이리하여 함적 등록만 1944년 10월 6일에 하고 1944년 10월 8일에 일단 진수식이 거행된다. 이 때도 해군 대신이 최선임자로 왔을 뿐 시나노라는 군함 크기에 걸맞은 일본 왕족들은 아무도 참석 안했으며 초대 함장이 된 아베 토시오 대좌는 "미완성 항공모함 시나노"란 소리를 진수식에서 하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안좋았다. 진수식 후에는 다시 도크로 들어가서 아직 남아있던 제111호함의 자재를 이용해서 손상부위의 수리를 진행했고 수리는 10월 23일에 끝난다. 하지만 워낙 손댈 부분이 많아서 준공과 취역은 1944년 11월 19일 군항 [[요코스카]](橫須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때는 이미 일본 해군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패배한 후였다. 준공 후에는 실제로 함재기가 이함, 착함을 할 수 있는지 실험이 진행되었다. 이 때는 이미 전황이 악화일로라 [[도쿄만]] 밖에서의 실험은 위험했으므로 도쿄만 안에서 왕복항행을 하면서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함재기 이착함을 진행한 조종사들은 시나노 승조원들이 미숙련자였으며 동작도 불안했음을 기억했다. 그리고 요코스카 기지가 미군의 공습으로 위험했기 때문에 준공했다고 서류상에서만 써놓았지 실제로는 마무리 공정이 아직 많이 남은 상태였고 함재기를 인수하여 항공대를 운영하는 실험도 하기 위해 일본 서부 [[세토내해]]에 자리잡은 [[구레]](吳)기지로 이동하기로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