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문경 (문단 편집) == 생애 == 오흥군(吳興郡) 오정현(烏程縣) 출신으로, 관리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문을 좋아하고 경서와 사서를 섭렵했다. 처음에는 [[선제(남진)|선제]]의 태자인 진숙보 밑에서 일했다가, 582년 진숙보가 즉위하자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진숙보가 즉위하자마자 [[진숙릉]]이 반란을 일으키고 [[수나라]]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는 가운데 군사 및 행정 사무를 맡을 인재가 필요했다. 시문경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관리의 직무에 뛰어났기에 진숙보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시문경은 또한 후주에게 [[심객경]], 양혜랑(陽惠朗), 서철(徐哲), 치혜경(暨慧景) 등을 추천하여 후주의 신임을 받았고 한편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이 불만을 표출했다. 후주 또한 시문경을 유능하게 여겨 시문경에게 내외의 사무를 총람하도록 하였다. 시문경은 중서사인을 그대로 받으면서 태자좌위솔로 승진했다. 589년, 당시 진희왕(晉熙王) [[진숙문]]이 오랫동안 상주(湘州) 자사를 맡으면서 인심을 얻었는데, 진숙보는 진숙문을 질투하여 진숙문을 대신하여 시문경을 도독, 상주 자사로 삼았다. 시문경은 후주에게 심객경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여 시문경가 심객경이 진나라의 국정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상서복야 원헌과 표기장군 [[소마하]], 문무관료들이 협의하여 경구(京口)와 채석(採石)에 5천의 군대와 200척의 전함을 배치하여 장강 상류에서 수나라 군대에 방비할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시문경과 심객경은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변경의 장수들이 맡으면 충분하오. 만약 사람이나 배를 낸다면 반드시 소란을 일으킬 것이오."라며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문경과 심객경, 원헌과 소마하의 대립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수나라 군대는 계속해서 남하했고 후주는 시문경에게 조정의 정무를 모두 위임하고 장수들의 의견을 모두 듣지 않았다. 시문경은 이후 낙유원(樂游苑)에 주둔했다가 진나라가 멸망한 뒤 심객경, 양혜랑, 서철, 치혜경 등과 함께 수군의 지도자 진왕 양광에 의해 석궐 앞에서 참수되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89년 사망]][[분류:후저우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