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시 (문단 편집) ==== [[송원시대]] ==== [[파일:시안 중국 명대성.jpg]] [[파일:시안성 2.jpg]] 명대에 세워진 서안부성의 성탑들 [[북송]] 때는 [[태조(송)|송태조]] 조광윤이 [[천도]]를 논한적이 있는데 976년, 송나라가 개국한 지 16년이 지났을 때, 송태조가 낙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제사를 마치고도 낙양에 머물며 개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신하 이회충이 개봉에는 운하가 있고, 곡식이 수백만 석씩 올라오는데, 도성을 지키는 수십만 병력들은 그걸 먹고 살고있다고 하며, 폐하가 낙양에 머물면, 수십만 병력들은 뭘 어떻게 먹고 사느냐며 낙양 천도는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송태조는 낙양 천도는 장기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좋은 것은 장안으로 천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태조는 자신이 서쪽으로 천도하려는 것은, 산과 강의 험준함을 이용해 [[주나라]], [[한나라]]의 일을 본받고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줄여 용병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장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태종(송)|송태종]] 조광의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험준한 지형에 있지 않다며 조운이 갖추어져 물자가 풍부한 [[카이펑시|개봉]]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광윤은 "진왕(당시 조광의의 왕작)의 의견은 훌륭하나 백년이 넘지 않아 천하 백성들의 힘이 고갈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송태조가 붕어하면서 이렇게 송나라 때의 장안 천도 논의는 유야무야 되었고 개봉이 계속 송나라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난 후 잔존세력은 [[남송]]을 건국하였으며, 경제력이 좋은 강남에 가깝고 방어에도 [[난징]]보다 나은 강남 동부 해안의 임안([[항저우]])로 수도를 옮긴다. 이후 [[남송]]이 몽골에 의해 끝내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들어선 [[몽골인]]의 [[원나라]], 그리고 다시 [[한족]]의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왕조들을 거치며 서안은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했다. 북방계 민족으로 나라를 세웠던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들은 자신들이 기원한 [[내몽골]]이나 [[만주]]와 인접한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고, 금나라가 도읍을 정한 때부터 현재까지 800여 년간 베이징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 왕조들은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수도가 있었던 곳이라 연경이라 칭했는데, 이는 연경 일대가 자신들이 진출해야 할 중원 대륙과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