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영 (문단 편집) == 생애 == 태조 곽위가 죽자 32세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했다. 곽위의 눈은 틀리지 않았는지 이 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뽑히는 인물이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거란]]과 결탁한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의 황제 [[유숭]]의 공격을 받았는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고([[고평 전투]]), [[조광윤]]의 활약으로 이를 격퇴했다. 이 여세를 몰아 분열된 [[중국]]의 통일 사업을 계획하고 착수하여 서남의 [[후촉]]을 멸망시키고 [[남당]]을 제압하여 장강 이북의 패권을 쥐었다. 내정에서도 많은 개혁 정책을 실시해 농업 분야와 조세 제도및 법제 개편 등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렇듯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간 명군으로 북방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라[* 이때 기동성 있는 행군으로 요나라의 허를 찌르고자 병마를 [[대운하]]를 이용해 북상시켰다고 한다.] 최남단 영주와 막주를 수복하고 유주[* 오늘날의 베이징. 요나라는 이곳에 5경 중 하나인 남경 석진부를 두었다.] 공략에 나서던 중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고[* 그의 업무 스타일은 [[제갈량|모든 사안을 직접 챙기는]]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 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로 인한 과로가 갑작스런 병사의 한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관련하여 중국 북송 때의 학자인 왕질(王銍)이 쓴 소설인 묵기(默記)에서는 기괴한 이야기 한 편을 전하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살피던 신하 왕박이 어느 날 세종을 찾아와서 이상한 현상을 보았으니, 꼭 보러 가자고 간곡히 부탁하여 세종은 왕박과 함께 오장하(五丈河)로 갔는데, 허공에 불타는 수레바퀴([[UFO]]?)가 날아다니고 그 위에 3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火輪小兒)가 앉아 있었는데, 왕박은 세종한테 그 어린아이한테 엎드려 절을 하라고 말했고 세종이 그렇게 했더니,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에 둘 다 갑자기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http://todayhumor.com/?mystery_8921|출처]] 다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괴담류에 속하는 것이니, 너무 진지하게 믿지는 말기 바란다(...)] 이후 [[곽종훈|일곱 살 난 아들]]이 제위를 계승했으나, 곧 군부의 장수들이 장군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를 '''[[진교의 변]]''' 혹은 진교병변이라고 한다. 송 태조 조광윤도 세종의 휘하에서 장군으로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이 진교병변으로 [[북송]]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덕 2년(955년), 잔혹한 [[불교]] 탄압 정책으로 [[삼무일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삼무일종에 대한 설명은 [[세조]] 항목의 북위 [[태무제]] 참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송나라 이후로는 불교적 색채가 당나라보다 상당히 약해졌고, 그 자리를 [[도교]]가 채웠다. 불상을 녹여 화폐인 주통전을 만들었는데 당시 세간 사람들은 “주통전이 유통되는 한 세종은 지옥에서 구제받지 못할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흔히 '시세종(柴世宗)'이라고 불리며 [[수호전]]에 등장하는 소선풍 [[시진]]의 조상이 되는 인물로 송나라의 전신인 후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송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요절만 안하고 후계자만 적절했어도, 중원 통일은 시씨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종 자신부터가 천하통일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신하들에게 '''"첫 10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고, 그 다음 10년 동안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태평성대를 이뤄보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30년은커녕 첫 10년도 반밖에 못 채우고 죽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시영이 끝내지 못 한 일을 역시 명군이었던 부하 조광윤과 그 아우인 [[태종(송)|조광의]]가 마저 끝냈다는 것이다. [[주전충]] 같은 폭군이 이어받았으면 시영의 노력이 허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조광윤 또한 그의 수하로 시작해 세종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군공을 세웠고 세종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시영은 죽기 전 조광윤에게 거의 모든 군권을 넘기고 황실을 보호해 달라고 유언하며 죽는다. 결과적으론 나라는 빼앗겼지만, 다른 황조들의 정권 교체 당시, 전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낸 것과 달리 조광윤은 시 세종의 후손들[* 정확히는 방계. 세종의 아들인 공제 시종훈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해서 세종의 친부인 시수례의 다른 자손들이 시씨 가문을 이어갔다.]을 우대하였다.[* 즉, 나라는 빼앗었지만 황실을 보호해달라는 유언을 조광윤은 지킨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덕분에 시씨 가문의 수장은 송대에 걸쳐 대대로 [[단서철권]]을 받았으며, 황실이 도망갈 때 끼워주거나 하는 등 특권을 받으며 번성하게 된다. 이덕에 남송 최후의 항전인 [[애산 전투]]에서 수많은 시씨 문중 사람들이 송 황실과 그 운명을 함께할 정도로 충성을 바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