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와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시와 이집트 6.jpg|width=700]] 샬리 성채에서 내려다본 구도심과 신도심 다만 [[카토]]와의 논쟁을 시작으로 [[로마 제국]]기에 들어 신탁의 위상은 점차 하락하였고, [[예수]] 탄생 이후 시와를 방문한 역사가 스트라보 역시 그곳의 신관이 예전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다른 이집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2세기 이후 [[기독교]]가 전래되며 신전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세상과 격리된 시와에는 일찍부터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며 기독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을 거치며 시와 주민들은 열정적인 기독교도가 되었고, 708년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이후 결국 [[이슬람 제국]]에 복속하긴 했지만 기독교 신앙은 유지되었다. 11세기 [[안달루스]]의 지리가 알 바크리가 기록했듯 당시까지 주민은 전부 [[베르베르 인]]이었다. 다만 [[파티마 왕조]]의 이주 정책으로 아랍계 [[베두인]]들이 유입되었고, 12세기의 알 이드리시는 주민 중 일부가 아랍인이라 기록하였다.[* 파티마 조가 [[지리 왕조]]를 응징하기 위해 보낸 바누 술라임과 바누 힐랄의 경우 상당히 전투적이었는데, 시와 주민들이 그들에게 패하고 개종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의 영향 때문인지 시와는 12세기 말까지 이슬람화되었다. 다만 개종을 전후로 여러 혼란을 겪었는지 1203년 현지 문서에 의하면 시와의 주민은 7개 가문의 40인 (남성만 집계된듯)에 불과하였다. 15세기 [[맘루크 왕조]]의 역사가 알 마크리지는 시와를 방문하고, 현지 언어가 제나타 베르베르 인들의 것과 비슷하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로마시대 이후 처음으로 시와에 당도한 유럽인은 영국의 여행가 윌리엄 조지 브라운으로, 1792년에 아문 신전을 보기 위해 방문하였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시와를 주피터 암몬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두 신전은 온전히 남아있었는데, 평지의 우바이다 신전은 1811년의 지진과 1897년의 폭파로 파괴되었다. 1893년 봄에는 독일인 탐험가이자 사진가 헤르만 부르하르트가 시와를 방문해 옛 도시를 촬영하였고, 이는 베를린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