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지(대구) (문단 편집) == 유적/유물 ==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509&cid=43065&categoryId=43065|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욱수동 고분에 대한 내용]] 오래 전부터 생명체가 살아왔다. 욱수천 퇴적암에 네발로 걷는 초식 용각류 공룡(중생대 백악기)의 발자국 화석이 있다. [[http://museum.gbgs.go.kr/relic/page.htm?mnu_uid=152&cmd=view&dic_no=1084|출처]] 4세기 중반 당시 수장층이었던 경산 임당 세력이 이 지역에 대규모 마을을 세웠는데, 지금의 욱수, 시지, 노변동을 따라 형성되었고 토기를 생산하는 대규모 가마터가 같이 들어왔다. 1990년대 신도시 개발 도중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690&yy=2017|출처]] 이 유적은 단일 발굴로서는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92-94년 시지지구 개발 초기에 발견된 분묘만 574기. 거기에 도로건설로 인해 발굴조사가 또 이루어지면서 1000기가 넘는 고분이 발굴되었다.[* 여담으로 경주 대릉원 일대 고분도 200기가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적들은 모두 발굴조사 후 유물들만 영남대학교 박물관으로 가고 모두 아파트로 뒤덮이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사월동지석묘군]] 같은 작은 문화유산들은 보존되어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지라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소중한 유적이 남아있는 대규모 복합유적지가 주거지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건물로 뒤덮힌 것이다. 최근에도 대구의 다른 곳 과는 달리 [[경주시|이 곳]]처럼 공사 한다고 땅만 파면 유물이 가득 발굴되는 편이다. 현재도 아파트 공사가 예정되어 있던 경산시 펜타힐즈와 맞닿아 있던 한 산에서 유물이 출토되어서 발굴 조사가 진행중인데 조사가 완료된 부분에 한해서는 현재 경산시 측에서 고분공원을 조성해 두었다. 자세한 것은 [[펜타힐즈]] 문서로. 여담으로 이 유적은 욱수동에도 일부에도 걸쳐 있다. 실제로 조성해놓은 고분공원 바로 뒤쪽으로 아파트 공사장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공사 진척도가 느린 상황이다. 발굴되는 것들은 일반인들의 생활시에 사용하던 도자기나 그릇 같은 것이 주를 이루며 이 유물들은 발굴조사 후 모두 영남대학교 박물관으로 보내어진다. 다만 현재는 시지지구 대부분의 땅이 개발된 후여서 그리 규모가 크거나 중요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시지지구 개발과정에서 나온 발굴조사 과정이라던가 사진 등은 모두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종합자료실 향토자료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유물들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람 할 수 있다. 향토자료에서는 발굴조사 뿐만 아니라 한창 개발이 진행중이거나 개발되지 않은 시지지구의 모습들을 볼 수도 있다. 가천동과 중산동의 원삼국시대 널무덤에서 출토된 칠초철검을 포함한 각종 철기류, 노변동과 욱수동 등 시지지구 고분군의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토기와 철기 등이 발견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4115|#1]],[[https://daegu.museum.go.kr/mbbs/boardarticleView.do?brd_id=BDIDX_m3hK4LUA8mdyd5qU97c8oI&cont_idx=346|#2]] 2016년엔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 마을 시지” 라는 제목으로 특별 유물전시를 했다. 물론 이곳을 개발하지 않았더라면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대구와 경산의 연담화가 어려웠을 것이며 여전히 지금까지도 [[수성구]] 내의 오지 중에 오지로 꼽혔겠지만, 이곳이 경주시처럼 유적지구 등으로 묶여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경주의 [[대릉원]]과 비슷하게 [[수성구]]와 [[대구광역시|대구]]의 관광객을 끌어들일 중요한 수단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현재도 이 지역에서 일하는 역사교사나, 근처 역사학자 및 교수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그 모습은 [[불로동 고분군]]이나 [[대릉원]]과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 지역은 대부분 농토였기 때문에 발굴 당시에는 이미 무덤들의 전부 봉토가 남아있지 않았다. 여담으로 상단에 설명된 경산 중산동-대구 욱수동 고분군 유적도 봉토가 남아있지 않다. 산성과 토성이 축조된 흔적도 있는데, 고산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시지지구 남쪽의 안산에는 욱수동산성이 남아있다. 욱수동산성은 자산성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흔적으로 시지지역 초등학교인 신매초등학교의 교가에는 ‘자산산성’이 가사로 들어가있다. 이 지역에 살고있는 지역 주민들도 모른 채 방치중인 유적지도 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38992&cid=43065&categoryId=43065|신매동 집자리]] 라는 유적인데, [[http://kko.to/YuO0bluDM|로드뷰]] 집자리〔住居址〕 1기와 그 밖에 조선시대 구덩유구〔竪穴遺構〕, 기둥구멍군〔柱穴群〕이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골아가리무늬토기〔口脣刻目文土器〕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가 출토되었으나 발굴조사 중 주변 부지에는 아파트가 건설되고 현재는 유적이었던 부분만 아주 작은 공터로 남아 현재는 방치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