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파히 (문단 편집) == 티마를르 시파히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alamb_Sipahi.jpg]] 티마를르 시파히(Timarlı Sipahi). 해석하면 영지를 가진(티마를르) 시파히라는 뜻으로 한국 내에서 시파히 하면 보통 이 쪽을 가리킨다. [[무라트 1세]] 시기에 창설되었고 군복무와 공적에 따라 보답받는 '티마르 제도'[* 티마르는 제도 상에서 영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데, 넓이로는 약 2만 에이커(약 800 헥타르) 미만이었다. 그 위로는 중간 장교급들에게 배당되는 '지아멧'으로 2만 ~ 10만 에이커 사이였고 최고위 장교들이 배당받는 영지는 '하스'로 10만에 가깝거나 10만 에이커 이상이면 하스로 통한다.]에 기초하여 구성된 정예'기병'집단. 흔히 대충 중세 후기, 근세 이슬람 오스만 버전 유럽 봉건 기사들이라 설명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자세하게 따지고 보면 정치적 목적이나 운영 시스템 자체가 확연하게 다르다. 서유럽을 기준으로 특정 영지에서 상속 가능한 봉토를 가지고 현지에선 소군주로 군림하는 유럽의 봉건 기사들처럼 땅을 완전히 받은 게 아닌, 현대로 따지자면 상가에 상점을 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자세히는 범죄자들을 붙잡을 경찰권과 영주로서 세금을 수거할 권리[* 다만 이는 순전히 좋은 권리는 아니었는데 영지를 발급받은 만큼 '''자기 군비를 자기가 직접 충원해야 했다.''' 거기에 세금은 면제해 줬지만 그렇다고 지원금을 주거나 한 것도 아니라 자기 영지에서 돈을 못 뽑아내면 그대로 파산이다.]등 기본적인 권리는 있으며 관리자가 나라에 세금낼 의무는 면제받았지만 죄인을 재판할 권리는 '''없고'''[* 죄인을 벌하려면 지방에 있는 법정에 이들을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해야 했다.] 땅을 개간시키면 보상을 받는다던가 영지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반대로 벌 받는 것 등등 '지주'보다는 '왕의 대리인'자격으로 일시적으로 눌러앉은 것에 가깝다. 애초에 기초가 된 티마르 제도부터가 '''점령한''' 영토를 빠르게 다스려 본국에 융화시킨다는 걸 중심으로 한지라 원래부터 그랬던 셈이다. 따라서 지방 분권적 중세 구조의 군사적 상징이었던 유럽의 기사계급과 달리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는 이슬람-튀르크-몽골 세계에 원래 존재하던 족장이 수직적으로 가신들에게 전공을 분배하던 게 동로마 제국의 [[프로니아 제도]] 영향을 받아 봉토 분배 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이고, 따라서 적어도 이론적으론 오히려 코스탄티니예 술탄-한의 권력을 더 강화해 주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물론 당연히 이건 이상적인 상황에서 이론적으로나 그런 거고, 실제로 동부 아나톨리아 지방이나 현대 이라크 사파비 국경 지대, 카프카스, 현대 북마케도니아 일대처럼 중앙 행정력이 잘 닫지 않는 지방에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는 어느 순간 목이 댕겅 잘려 있고 실제론 현지 티마를르 소유자들이 주로 정복 이전 토착 귀족, 부족장, 성직세력 등과 결탁해서 실질적인 왕을 해먹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위의 제약들 외에도 기본적으로 티마르를 배분받은 시파히는, 상술한 각주에서 설명한 영지 크기에 따라 '제벨루(jebelu)'라 칭해지는 추가징병을 스스로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종기사 또는 [[스콰이어]]에 해당하는 위치로 주로 혈육 중에서 뽑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하위 영토인 티마르의 경우 5명 지아멧의 경우 최대 20명 하스의 경우 상황에 따라 최소 20명 이상은 제벨루를 들여야만 했고 7년 이상이나 군에 들어가지 않고 쉬기만 하면 토지를 박탈했다가 다시 공을 세우면 복권시켜 주었다. 전시에 시파히와 제벨루는 크게는 '루멜리(발칸) 시파히'와 '아나돌루(아나톨리아) 시파히'로 분류되어 지휘를 받았다. 유럽에서 싸울 때는 '루멜리 시파히'가 우익[* 전통적으로 우익이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에, '아나톨리아 시파히'가 좌익에 섰고 아시아에서 싸울 때는 그 반대로 서서 싸웠다. 이들의 무장 또한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루멜리아 시파히들이 둥근 방패와 랜스, 검, 투창과 체인 메일 등 유럽 기사에 가까운 무장을 한데 반해, 아나돌루 시파히들은 둥근 방패와 킬트, 터키식 복합궁과 검 등 전통적인 궁기병의 무장을 갖추었다. 또한 무장이 다르다 보니 전술도 달랐는데, 먼저 루멜리 시파히는 투창을 이용해 적군의 기병대를 유인한 다음 기병대와 보병대가 따로 떨어진 틈을 타 기병대를 포위, 섬멸하는 전법을 즐겨 썼다. 또한 아나돌루 시파히는 보통 궁기병이 그렇듯 활과 화살을 이용한 [[스웜 전술|'치고 빠지기']] 가 기본. 하지만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갑옷의 중요성이 낮아진 17세기부터는 [[열병식]]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갑옷을 입지 않고 천으로 된 옷을 입거나, 갑옷을 일부만 입었다. 이들은 한창 팽창하던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자 제벨루까지 포함해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토지를 배분받는 장교'라는 특성에 화약무기의 발달, 예니체리의 적폐화까지 겹쳐 나날이 규모가 축소되는 와중에 결국 1600년 당시 티마를르 시파히만 해도 5만에 제벨루를 넣으면 14만에 육박하던 대규모 집단이 19세기엔 '''제벨루를 포함해도''' 수천 대일 정도로 폭락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영지의 정예군으로 남았고 예니체리가 나라안에서 세력싸움으로 소멸해 갈 때 이들은 배당받은 티마르를 사유재산으로 인정받는 대신 조용히 은퇴하여 신식군대와 세대교체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