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황제/평가 (문단 편집) === 법가 사상의 맹신 === 시황제는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 후에 불편함 등을 이유로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 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령을 고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계속 적용, 지속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질렀다. 효공 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었다. 법가 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 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건 비단 시황제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황제는 이러한 법령을 고치지 못했으며 결국 적절한 개혁을 하지 못한 진나라는 외부의 적이 더 이상 없음에도 내부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진나라의 제도가 《[[상군서]]》나 《[[한비자]]》에서 서술하는 법가를 완전히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는게 함정.] 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전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6국과 벌인 전쟁 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 당한 6국 백성들은 작위가 있을 리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본 문단과 반대되는 정황을 암시하는데, 2000년대 발굴된 시황 25년 ~ 이세 2년까지의 행정문서인 《리야 진간》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6국의 작위를 진나라의 상응하는 작위로 인정한 정황이 보인다. 리야는 본래 초나라 지역인데 '형 불경 아무개' 형태의 문구가 발견된 것이다. '형'은 곧 '초'의 피휘(장양왕 영자초)이므로 '초 불경'이 되는데 진나라의 '불경'에 해당되는 초나라 작위를 보유했던 아무개란 뜻이다. 공문서에서 멸국으로 무효화된 작위를 진나라의 대응 작위로 맞추어 표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진나라에서도 6국 유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작위를 인정해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리야 진간》은 20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고, 2009년에야 독문이 공개되었다. 계속 연구가 진행중이므로 널리 받아들여진 정설로 보기에는 이르다. 적어도 한번은 통일 기념으로 한 등급씩 작위를 올려준 기록이 있긴 하다.] 사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 원인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목이 베이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 때문이었다[*반대증거 당대의 기록인 《수호지 진간》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인솔하는 관리에게 국가에 배상하는 의미로 지각한 날짜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만 있다. 《진률》 전체가 발굴된건 아니라 지각하면 사형시키는 조항이 없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인솔 책임자는 노동력 제공을 늦게한 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늦게나마 도착한 "노동력"을 죽여 없애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일종의 판례모음에는 (지각보다 죄질이 훨씬 나쁜) 노역에 노쇼하거나 도망한자에 대한 처벌이 태형이란 예시도 있기때문에 사형은 말도 안된다]. 본디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중국 내륙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특히 중국 동부는 [[장마|폭우가 여름철에]] [[태풍|자주 오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 진나라 방식의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앞에서 말한 진승과 오광의 난도 여름철이면 장마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오늘날 [[안후이성]] 지역[* 진승 일당이 발이 묶여 반란을 일으킨 대택향은 오늘날 안후이성의 쑤저우다.]에서 음력 7월 여름 장마 도중에 벌어진다. 이후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통치의 수단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는데, 한 제국은 유교를 근간 이념으로 삼고, 법가는 제국을 운영하는 제도로서 삼았다. 한 제국은 법가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나라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게다가 한 제국 초기엔 도가가 상당히 흥하는 등 유가, 도가[* 유방의 건국 공신 장량이 도가에 귀의한 것이 대표적 사례. 다만 진나라도 도가의 영향이 상당히 짙었고 유가는 한나라에서도 무제이전엔 진나라 에서처럼 마이너였다. 사상의 트렌드라는게 그리 쉽게 변하진 않는다.], 법가가 서로 어우러진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漢)나라가 이처럼 법가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 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 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 만에 망해버린 진 제국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 제국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 진나라가 법가의 실용성을 주장하며 유학을 탄압하자 유방 본인이 '쓰잘데기 없는 거 치워버리니까 좋네!'라고 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다시 배우게 되자 과거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였다는 이야기.]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제(전한)|고조]]가 꾸짖었다. >“이 어르신(乃公)은[* 이게 잘못 쓴 것이 아니라 유방의 말버릇이 사실상 이랬다. 평민 출신으로 올라왔고 그 출신 면모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드러낸 유방답게 어투도 일반 군주와는 조금 달랐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들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실제로도 한나라는 법률과 관료 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도가(황로사상)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 상황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시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 만에 멸망한 진 제국과 달리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시황제, version=163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