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인 (문단 편집) === [[중국]]의 식인 === "關中饑人相食(관중지방에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류의 기사는 중국 측 사서에 널려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국이 고대부터 높은 인구 밀도와 [[황하]]와 [[장강]]이라는 두 큰 강과 큰 강의 지류들에 많은 농업 용수를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홍수나 가뭄이 들 때(특히 중심부를 관통하던 황하 쪽[* 황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송나라]]까지는 동진하면서 버티다가 끝내 황하 유역을 포기한다.]) 한 해 농사를 얄짤 없이 말아먹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 [[우왕]]의 고사와 함께 나온 게 '황하를 다스리면 천하를 다스린다.'] 이런 경우에는 기근도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로 오는 지라 대규모 기근 와중에 생존을 위한 식인이 많았다.[* 인상식(人相食)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했다.] 여기에 잦은 전란까지 더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밖에도 심리학적으로는 타인을 말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식인하는 일도 있다. 영화 [[올드보이(2003)|올드보이]]에서 오대수의 대사인 "네 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을 테니까. 동서남북 어디서도 네 시체를 찾을 수 없을 거다"라는 표현이 이런 심리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다. 미워하는 상대를 저주하거나, 악인의 행패를 비난하는 주 코드가 식인이었던 셈. 이런 경우는 '식인종'이어서가 아니라 강렬한 복수감으로 인해 식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능지형]]을 당한 자에게 심한 피해를 입었던 자들이 그 살점과 내장을 씹으며 분개하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근래에는 [[문화대혁명]] 시절의 [[홍위병]]들과 주민들이 지주를 습격하여 일가족을 [[강간]] 도륙하고 그 시체를 씹어먹었다. 이런 식으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식인이 아닌 식인 또한 [[중국]]의 고대부터 근대에까지 있었다는 설들도 있다.[* 분명 중국 대륙에는 식인이 법과 제도에서 허용이 된 민족들도 있었고, 그 민족들과 어울리며 살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상나라]]의 수도 유적인 은허에서 나온 유물 중에 삶은 인간 두개골이 잔뜩 들어있는 항아리도 발굴했고,[* 전쟁에서 이기면 적장이나 적의 용맹한 사람 등등의 머리를 잘라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상시라고 해서 시체를 판매하는 시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건 국가 단위로 이렇게 허용하는 게 아니라 당대 중국에 식풍습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설이 논쟁거리. 물론 여기 나온 사례들은 현대까지 지속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불법에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반적으로 식인 행위를 하고 다녔다가는 당연히 인식이나 결과가 영 좋지 않았다.[* 죄인은 인간 취급을 하지도 않았고, 악인이나 증오 혹은 복수 대상의 심장을 뽑아 먹거나 하는 문화가 있긴 있었지만 사람을 그냥 잡아먹고 다니지는 않았다.] 문화 상 광기에 찬 상황이 일어나거나 하면 현대에도 인육을 섭취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상인들이 그냥 사람들을 잡아먹고 다녔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말기 중국 내에서는 서양인들의 의술과 고아원 설립 같은 기독교의 선교 같은 것을 보면서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 약으로 쓴다는 오해를 해 간간히 당시 서양의 중국 침략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서양인들에 의한 테러가 발생했고 [[의화단 운동]]이 그 오해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복수와 말소를 앞세운 서양인에 대한 식인이 이 의화단의 난 시절에 벌어졌다. [[춘추전국시대]] 사료를 보면 [[醢]](젓갈 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것이 인육으로 담근 젓갈을 의미하긴 하지만 '''[[음식]]'''으로서의 젓갈이 아니라 '''[[형벌]]'''이다. 먹자고 젓갈을 담근 게 아니라 경고성 표지로 사람 젓갈을 담근 것으로, [[콩쥐팥쥐]]의 팥쥐가 이 형벌로 유명하다. 처형한 시체를 소금독에 담궈서 만들거나 아니면 산 채로 소금에 절였다고 하는데, 당연하지만 일반적으로 이걸 먹지는 않았다. 시체를 훼손하고 제후들에게 보내어 협박용으로도 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용의 문제 때문에 이 젓갈로 만드는 형벌은 일반인들은 받기도 힘들었다. 당시에는 소금이 귀했기 때문에 지도자의 심기를 매우 거스르는 행동을 해야 받을 수 있는 형벌이었다. 열국지에도 가끔 나오며, [[한고제|유방]]이 [[팽월]]을 고기젓으로 만들어 제후들에게 보냈다고 할 때 그 젓갈이다. 다만 해(醢) 글자 자체는 먹는 젓갈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원래는 [[사슴]], [[양(동물)|양]], [[토끼]] 등의 고기를 가지고 만드는 젓갈로 당육전에 기록했으며, 이를 담당하는 관청도 있었다고 한다. [[공자]]가 식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공자식인설]] 문서로.[* 사실 밑의 유비와 함께 이런 썰들은 딱히 증거가 없다.] 중국 십팔사략과 같은 역사서를 보면 인육을 먹는 장면이 꽤 나온다. [[은나라]] 주왕이 [[주나라]] 문왕의 아들 희백읍고를 죽여 그 고기를 먹게 한 것이나, [[제나라]]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의 요리사 [[역아]]가 자신의 아들로 요리를 만들어 바쳤다가 경계를 받은 것, 후조의 2대 왕이었던 석호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육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인육을 식품으로 여겼다기보다는 일종의 문화적 보복이나 광기에 가까운 행위였다. 진문공 중이의 천하유랑 시절에 배를 곯은 문공에게 개자추가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먹였다는 일화가 있다. [[유비]], [[손건]] 역시 한 농민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농민의 부군인 유안은 대접할 게 없어 아내를 살해하고 그 볼기를 떼내어 [[늑대]]고기라 속여서 대접하였고, [[삼국지연의]][* 물론 정사가 아니라 소설이다.] 등의 이 이야기는 유비를 향한 농민들의 인기를 대변해주며, 농민들이 유비를 좋아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례이다. 그 외에도 후한 말의 [[장홍(삼국지)|장홍]]도 자신의 애첩을 죽여 병사들을 먹였다. 게다가 이건 정사에 기록된 실제 내용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요리사 [[역아#s-1]]는 [[제나라]] [[제환공|환공]]이 농담으로 "다른 고기는 다 먹어 봤지만 인육만 못 먹어봤다."라고 했더니 [[패륜|자기 아들을 요리해서 바쳐 신임을 얻었다.]][* 이에 제환공은 처음에 이런 짓을 한 것에 역겨워했지만 그만큼 자신에게 충성적이어서 그런 것 아니겠냐는 역발상이라도 들었는지 아들도 거리낌 없이 죽이는 놈이 군주를 제대로 섬기긴 하겠냐는 관이오의 진언을 무시하고 역아를 중용했다.] 이 에피소드를 보면 당대 중국 최고의 세력을 가졌던 군주인 제환공조차 인육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식인이 결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제환공은 말년에 저 요리사에게 역관광 테크를 제대로 먹고 울화 터져 사망. 당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5대 10국 시절의 후한(後漢 서기 947~951년) 사람이었던 조사관(趙思綰 ?~서기 949년)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식인 행위를 공공연하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악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다가 군대에 들어갔는데, 여러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공을 인정받아 영흥절도사(永興節度使)라는 관직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조사관은 잔인하고 사나운 성격 때문에 평소에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옛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성을 차지했을 당시, 장안성이 후한의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조사관의 군대는 차츰 식량이 떨어졌고 그러자 조사관은 장안의 백성들을 죽이고 그 시체의 살점을 도려내어 자신과 병사들이 먹는 식량으로 썼다. 특히 조사관은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1천 개 먹으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해진다!"라고 외치면서 시체에서 금방 빼낸 간을 먹기 좋아했는데, 이런 점을 본다면 조사관과 그의 부하들이 저지른 식인은 식량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인육을 먹으면 용감해진다는 일종의 미신적인 동기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http://todayhumor.com/?mystery_8928|9만 명을 잡아먹은 식인마 군대]] [[수호지]]에서도 식인이 등장하는데, 음식의 의미라기보다는 저 사람이 미워서 씹어먹고 싶다는 얘기를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 하지만 애시당초 [[장청]]과 [[손이랑]] 부부가 하는 짓이 나그네한테 몽환약 먹인 후 해체해서 수육이랑 [[만두]]로 팔아먹는 데다 [[송강(수호지)|송강]] 역시 귀양 가다 이립의 주막에서 몽환약에 당해 만두소가 될 뻔한 걸 [[이준]]이 구해주고, [[이규]] 역시 자기를 사칭하는 도적을 죽이고 맨밥만 먹다가 반찬 삼아서 같이 먹은 게 그 도적의 허벅지살이니, 음식의 의미로서의 식인도 자주 나온다.] 또한 이것을 당시 중국의 일반적인 풍습으로 볼 수 없다. 수호지의 등장인물들은 끝내 마왕이고 도적떼라서다. [[양판소|전국구 조폭의 막장 드라마를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적인 풍속을 산출해 낼 수 있나?]] [[삼국지연의]]에서도 도망 중인 [[유비]]를 대접하기 위해 한 농민이 자기 아내의 살을 잘라내 유비에게 대접하며, [[오나라]]에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잠혼]]을 죽인 뒤 그 살을 씹는 장면이 나온다. [[진궁]]이 [[조조]]와 헤어지는 이야기도 인육이 소재고, 그 외에도 객잔에서 손님이었던 자를 만두 속으로 바꾼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나온다. 1361년 고려에 쳐들어온 [[홍건적]]들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키자 [[임산부]]의 젖을 잘라 불에 구워서 먹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https://blog.daum.net/naymbi/192|#]] [[명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전 세계적으로 기후가 낮아져서 흉년이 들었고, 그래서 중국 각지에서 식인 행위가 잇따라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흙이나 돌을 먹다가 그렇게 하면 위장이 터져 죽으니, 이미 굶어죽은 사람의 살점이라도 먹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으며, 간혹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식인 장면을 보고 꾸짖으면 식인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며 "내가 사람을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먹으니 내가 먼저 사람을 먹을 수밖에 없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이 역시 엄연히 정사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출처: 천추흥망/ 명나라- 대항해의 선구자/ 안쩐 지음/ 정근희 번역/ 따뜻한 손] 중국을 비하하는 소재로도 자주 쓰인다. [[대만]] 학자인 황문웅[* 극렬 [[반중]], [[혐한]] 성향의 책을 쓴다. 저서를 보면 《중국・한국의 반일역사교육의 폭주》, 《중국이 일본에 이길 수 없는 일곱 가지 이유》, 《한국은 일본인이 만들었다》, 《한반도를 구원한 한일합방》 같은 부류의 책을 써 왔다. 또한 [[말뚝테러 사건]]을 일으킨 극우 단체 '유신정당 신풍'의 강사를 맡는다.]의 책 '중국의 식인문화'가 관심을 끌면서 종종 재발굴된다. 다만 역사학적으로는 대만에서 일본을 대상[* 처음 출판을 일본에서 했다. 국내에 소개한 책은 이것의 번역.]으로 [[혐중|반중국 정서를 유도하려고 만든 불쏘시개 괴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공자 이야기나 수호전의 인육 만두는 당연하고 유비가 인육 좋아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이건 삼국지연의의 농민이 아내의 살을 베어서 식사 대접했다는 그 대목의 오마주? 특히 자주 인용되는 것이 철경록(輟耕錄)이란 책. [[원나라]] 말에 도종의가 쓴 수필집인데, 넷상에서는 인육 요리책인 양 호도되어 돌아다니곤 한다. 실제로는 식인에 대한 기술은 몇 줄이 고작이며 그나마도 비판하는 내용. [[쌍십절]](10월 10일)이 인육을 먹는 날이며, 이 날 중국인들이 인육을 먹으러 한국으로 몰려온다는 괴담이 있었는데, 쌍십절은 [[중화민국]]의 건국일이다. [[중화인민공화국]](건국일은 10월 1일)도 [[신해혁명]]이 일어난 날짜이기에 기념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본질은 [[제노포비아]]적 유언비어라고 보면 된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도 일부 지식인들을 잡아가다 살해해 인육으로 먹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