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간회 (문단 편집) == 해소 == 이 사건 이후 [[최린]]과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등 자치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들어온다.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까닭에 일제 당국의 탄압하에서 기대한 만큼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때문에 광주 학생 운동 이후 자치론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참여하면서 삐꺼덕 거리기 시작... [[김병로]]로 대표되는 새 지도부가 이들과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신간회의 창립 이념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신간회가 저 방침을 내놓은 계기가 [[민족개조론]]이 나오고 최린의 천도교 신파와 송진우와 [[김성수(1891)|김성수]] 등이 자치주의로 틀려고 한다는 것에 사회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통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계기였는데, 이후에 자치 운동과도 손을 잡을 것이면 신간회의 존재 의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후 자치 성향과 타협주의가 더 강해진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아마 그 이후의 신간회는 독립 운동 단체라고 불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 대륙에서 장제스가 1차 국공 합작을 깨트리고 공산당을 토벌하기 시작하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신간회 내부의 사회주의자들[* 대표적인 인물로 [[강기덕]]을 들 수 있다.]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해소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제의 해산 시도[* 일제는 합법적 단체가 존재하면 그 단체만 관리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창단을 허용했는데, 그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기껏 허용한 단체를 다시 불법화 할 명분을 찾지 못해서 어떻게 해산 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에, 중앙 지도부는 일제의 집회 금지로 인해서 지회와는 별개로 설립한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은 거의 배제된 상태로 출범했고, 노조에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던 지회들은 중앙 지도부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보였다. 이들을 타협시킬 수 있는 정통성 있는 기존 지도부는 모조리 일제에 투옥되어 있는 상황[* 이들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해소를 반대했다.]. 내부 분열이 심하게 터져버리고 지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은 해소 후 재창단을 주장,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지회가 점점 늘어나서 중앙 집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31년 전체 대회가 열렸고 격론 끝에 투표를 한 결과, 해소 후 재창단 쪽이 더 많은 표를 받으면서 스스로 해체, 그리고 재창단 시도를 하지만 일껏 해소된 신간회를 다시 창단하게 내버려둘리가 없는 일제가 재창단 행사를 방해하면서 진짜로 없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