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도환 (문단 편집) == 생애 == 1922년 5월 25일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용기리[*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의 피해자 중 하나인 [[김중태(1940)|김중태]]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지주였던 아버지 신중업(辛仲業, 1871 ~ 1938. 5. 1)[* 영산·영월신씨대동보 11권 161쪽에는 신상업(辛相業)으로 등재돼 있으며,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辛'''{{{+1 重}}}'''業이다.]과 어머니 [[충주 지씨]] 지낙이(池洛伊, 1878 ~ 1957. 5. 14) 사이에서 8남매 중 막내 아들로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20425.00000015.000200|태어났다]]. [[대구달성초등학교|달성공립보통학교]](13회)를 졸업하고 [[일본]] [[야마구치현]] [[호후시]]로 건너가 다다라(多多良)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수료했으나, 2학년 때 다시 귀국하여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중학교]]에 전학하였다. 계성중학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 법학과 국제법연구실 3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 때부터 [[유도]]인으로 유명해졌으며 이후 모교인 계성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을 맞아 [[국민방위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종전 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3년간 국제법을 연구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으며 당선 후 [[자유당]]에 입당했다. 1958년 [[대한체육회]] 회장서리를 거쳐 이듬해인 1959년에는 대한반공청년단(정치깡패조직) 단장직에 취임한 후 1960년 [[3.15 부정선거]]에 개입하게 되었지만 같은 해 부정선거 관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에서 20년형을 언도받고 8년 3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정화법에 의해 규제를 당했으며 이후 정치규제에서 풀리고 1970년 [[신민당(1967년)|신민당]]에 입당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재기하였다. 이후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동구(대구)|동구]]-[[남구(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이효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 때 자신의 계보인 신우회를 만들었는데 소속 의원으로는 [[신상우]], [[이기택]], [[이상신]], [[김종기(정치인)|김종기]] 등이 있었다. 1976년 신민당에 [[이철승]] 대표 체제가 자리잡을 때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79년 5월의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측으로부터 은밀히 이철승 체제가 유지되게 해 달라는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계보 밑에 있던 이기택이 독자 계보를 마련하여 나가고 이기택이 2차 결선투표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여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고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풀려나고 이듬해인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 남구-수성구 선거구에 [[신한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치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8년 [[이민우(1915)|이민우]]의 뒤를 이어 신한민주당 [[총재]]권한대행이 되었으나 그 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체육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 대구에서 유도로 유명했다. 대구 계성중에 입학하면서 유도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졸업 때 3단, 일본 메이지대 재학시절 5단까지 올랐다. 일본 유도계에서는 그를 대표선수로 선발하려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포기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며 이후에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1979년), 범태평양유도연맹 회장(1980년), 유도고단자회 회장(1993년), 대한체육회 고문(1993년), 체육인동우회 이사장(1993년)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의 유도발전에 힘쓴 공로로 유도 명예 10단증을 받았다. 2004년 3월 24일 오전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노환으로 인하여 향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지는 대구 북구 매천동 선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