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 (문단 편집) === 왕실 === | '''{{{+1 《삼국사기》에 의거한 신라 왕실의 성씨 변화}}}''' | '''회차''' || '''성씨''' || '''재위기간''' || '''누적기간''' || || - ||[[박씨]](제1대 [[박혁거세]]~제3대 [[유리 이사금|유리왕]])|| 114년 || 114년 || || 1 ||[[석씨]](제4대 [[탈해왕]])|| 23년 || 137년 || || 2 ||박씨(제5대 [[파사왕]]~제8대 [[아달라왕]])|| 104년 || 241년 || || 3 ||석씨(제9대 [[벌휴왕]]~제12대 [[첨해왕]])|| 77년 || 318년 || || 4 ||[[김씨]](제13대 [[미추왕]])|| 22년 || 340년 || || 5 ||석씨(제14대 [[유례왕]]~제16대 [[흘해왕]])|| 72년 || 412년 || || 6 ||김씨(제17대 [[내물왕]]~제52대 [[효공왕]])|| 556년 || 968년 || || 7 ||박씨(제53대 [[신덕왕]]~제55대 [[경애왕]])|| 15년 || 983년 || || 8 ||김씨(제56대 [[경순왕]])|| 8년 || 992년 ||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씨가 여러 번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어떻게 박, 석, 김이라는 성씨가 다른 왕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게 가능한가. 또한, 왜 그 어떤 나라의 역사적 사료에서도 신라의 특이한 3성 정치 체제와 역성 혁명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는가. 사실 신라 초창기에는 성씨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김알지의 후손이라 전하는 김(金)씨 [[진흥왕]](540~576년)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 내에 있던 3개의 다른 집단인 박혁거세 후손, 석탈해 집단, 김알지 집단이 이때부터 성씨를 '''소급'''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성씨가 3개가 있는 것처럼 뒤죽박죽 마치 성이 바뀌듯 나오게 된다. 다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초반부는 불완전한 고대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화적인 대목이 많고, 초기 왕들의 지나치게 긴 수명 등 연도에 오류가 너무 많아[* 《삼국사기》 기록상 초기 왕들의 수명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긴 것은 [[고구려]]나 [[백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진흥왕 이전의 박씨, 석씨 왕의 통치기간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왕실은 대부분의 기간을 김씨 왕들이 통치하였지만 그들 모두 시조인 박혁거세를 참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는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 집단이 992년의 대부분 기간인 586년을 지배했지만, 모시는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였다. 중국이나 외국 사료에서 박혁거세 시조를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외부, 그리고 머나먼 후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지 못하고 그냥 왕의 성씨가 김(金)씨여서 김씨 왕조가 세운 왕조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신라가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김씨가 왕으로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에 신라가 기울면서 처남이었던 박씨 왕조가 728년 만에 잠깐 다시 부활하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다시 김부가 왕으로 등극하나 얼마 안가 고려의 왕건에 항복하고 신라는 992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신라 왕실의 군주가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하였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또 제18대 실성 이사금, 제19대 눌지 마립간, 제20대 자비 마립간, 제40대 애장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등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들 모두 박혁거세 신당을 자신들의 시조로 참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비록 성은 다르지만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석·김의 세 혈통 모두 박혁거세를 자신의 시조로 같이 모셨다고 볼 수 있다. 김씨가 왕위를 500년 이상 독점할 때에도 박혁거세 시조 참배는 계속 되었으며, 이러한 시조 박혁거세에 대한 신성함이 후대에 박씨 왕조가 잠깐이나마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래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는 보다 위의 개념이었고,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개념이었다. 즉, 신라에 적용을 해보면 성(姓)은 신라 왕실이 공동시조로 모셨던 박혁거세의 박(朴), 씨(氏)는 성(姓)의 하위 개념인 석(昔), 김(金)이 된다. 따라서 신라 왕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朴) 왕실이었고 역성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씨가 통치했던 시기에도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같이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분은 원래 중국에도 있었지만 [[진나라]], [[한나라]] 대에 이르러 없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통합된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이 신라시대를 보면 마치 박, 석, 김의 서로 다른 성씨가 왕위를 쟁탈하는 전쟁터, 역성혁명인 것처럼 비춰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성과 씨가 현재와 같이 통합되지 않은 다른 개념이었고[* 姓이 氏보다 더 위의 개념] 다른 어떤 나라의 사료에서도 신라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을 역성혁명처럼 보는 기록이 전무한 것을 고려해보면 신라가 건국된 박혁거세 때부터 멸망했던 경순왕 때까지 약 991년간 역성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박혁거세를 공동시조로 모시면서 '''같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朴)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실 안에 박(朴)씨 외에 석(昔)·김(金)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었고, 이 3개의 분파 중에서 김(金)씨가 왕위를 가장 오랫동안 많이 차지해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가야가 멸망한 후 김해 김씨 왕족들은 모두 신라로 흡수, 합병, 통합되었는데 이때부터 김씨들의 장기집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박씨 집단은 신라 초기에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이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다른 성씨 집단의 경우에도 박씨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면 왕위를 이을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석·김 혈통의 남성이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992년 동안 지속적으로 배출이 됐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하며, 나중에는 728년 만에 왕권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