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왕조 (문단 편집) === 원성왕계 왕실(하대) === ||<|24>'''{{{#fbe673 38.}}}[[원성왕|{{{#ffffff 경신}}}]]''' ||<|11>[[김인겸(신라)|인겸]] ||<|3>'''{{{#fbe673 39.}}}[[소성왕|{{{#ffffff 준옹}}}]]''' ||'''{{{#fbe673 40.}}}[[애장왕|{{{#ffffff 중희}}}]]''' || ||체명 || ||[[장화부인|장화]] || ||'''{{{#fbe673 41.}}}[[헌덕왕|{{{#ffffff 언승}}}]]''' ||○명[br]{{{-2 +[[정교부인|정교]]}}} || ||<|3>'''{{{#fbe673 42.}}}[[흥덕왕|{{{#ffffff 경휘}}}]]'''[br]{{{-2 {{{#fbe673 +}}}[[장화부인|{{{#ffffff 장화}}}]]}}} ||<|3>? ||<|3>? ||<|3>? ||<|3>정화 ||<|3>'''{{{#fbe673 53.}}} [[신덕왕|{{{#ffffff 경휘}}}]]''' ||'''{{{#fbe673 54.}}}[[경명왕|{{{#ffffff 승영}}}]]''' || ||'''{{{#fbe673 55.}}}[[경애왕|{{{#ffffff 위응}}}]]''' || ||효렴 || ||<|4>[[김충공|충공]] ||[[문목부인|문목]] || ||[[정교부인|정교]] || ||[[조명부인|조명]] || ||'''{{{#fbe673 44.}}}[[민애왕|{{{#ffffff 명}}}]]''' || ||<|1>의영 || ||<|12>예영 ||<|6>[[김헌정|헌정]] ||<|6>'''{{{#fbe673 43.}}}[[희강왕|{{{#ffffff 제륭}}}]]'''[br]{{{-2 {{{#fbe673 +}}}[[문목부인|{{{#ffffff 문목}}}]]}}} ||<|6>[[김계명(신라)|계명]] ||[[단의장옹주|단의]] || ||<|4>'''{{{#fbe673 48.}}}[[경문왕|{{{#ffffff 응렴}}}]]''' ||'''{{{#fbe673 49.}}}[[헌강왕|{{{#ffffff 정}}}]]''' ||'''{{{#fbe673 52.}}}[[효공왕|{{{#ffffff 요}}}]]''' || ||명 || ||'''{{{#fbe673 50.}}}[[정강왕|{{{#ffffff 황}}}]]''' || ||'''{{{#fbe673 51.}}}[[진성여왕|{{{#ffffff 만}}}]]''' || ||[[김위홍|위홍]] ||양정 || ||<|2>[[김균정|균정]][br]{{{-2 +[[정교부인|정교]]}}} ||<|2>'''{{{#fbe673 45.}}}[[신무왕|{{{#ffffff 우징}}}]]''' ||<|2>'''{{{#fbe673 46.}}}[[문성왕|{{{#ffffff 경응}}}]]''' ||<|2>? ||<|2>[[김인경|인경]] ||[[김효종(신라)|효종]] ||'''{{{#fbe673 56.}}}[[경순왕|{{{#ffffff 부}}}]]''' || ||[[김억렴|억렴]] ||[[김유렴|유렴]] || ||<|4>{{{-2 +[[조명부인|조명]]}}} ||<|4>'''{{{#fbe673 47.}}}[[헌안왕|{{{#ffffff 의정}}}]]''' ||[[문의왕후|영화]] || ||[[차비 김씨|?]] || ||<|2>[[궁예|예]] ||[[청광보살|청광]] || ||[[신광보살|신광]] || ||<|3>||<|3>[[김주원(신라)|주원]] ||<|2>[[김종기|종기]] ||장여 ||[[김흔|흔]] || ||정여 ||[[김양|양]] || ||[[김헌창|헌창]] ||[[김범문|범문]] || 선덕왕 사후 즉위한 사람은 열조 원성왕 김경신이었다. 김경신은 태종 무열왕계와도 꽤나 거리가 먼 새로운 왕실 계통이었다. 그의 집안은 [[태종 무열왕]] 이래로 [[잡찬]] 관등(3등)을 계승해왔다. [[원성왕]]의 고조부인 마차의 이름이 불교식 명칭이 아닌 것을 보면 [[진흥왕]]계는 아닌 듯 보인다. 원성왕계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분란은 원성왕이 장수한 것과 달리 그의 아들들이 단명[* 인겸이 죽자 차남인 의영이 태자로 오르나 의영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되면서 예겸의 아들인 준옹이 태자가 된다.]하면서 생긴 점이 강하다. 또한 원성왕이 본인의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그의 손자들을 상대등, 시중 등에 앉히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면서 생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왕위는 그의 장손이자 시중에 올랐던 준옹 즉 [[소성왕]]이 이어가게 되었는데 소성왕도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가 죽게 되면서 나이 어린 중희가 [[애장왕]]으로 즉위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애장왕에게는 욕심 많은 삼촌 언승과 수종이 버티고 있었고, 결국 애장왕과 그의 형제가 삼촌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신라 왕실에 암운이 드리우게 되었다.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언승 즉 [[헌덕왕]]은 김인겸(원성왕의 장남)계의 왕위 계승의 안정화를 위해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원성왕의 자손들 중 인겸계 못지 않게 자손이 번창중이었던 김예영(원성왕의 삼남)계였다. 애장왕 말년에 [[시중]]에 있었던 예영의 장남 김헌정의 시중 자리를 그대로 유지시켜주었고, 차남 김균정에게 헌정의 시중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헌정을 이후 병부령에 임명했다. 또한 인겸계는 김충공(김인겸의 4남)의 딸들을 각각 김제륭(헌정의 아들, [[희강왕]])과 김균정(김헌정의 동생이자 [[신무왕]] 김우징의 부친)에게 시집보내면서 두 계통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무열왕의 직계 [[김주원(신라)|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구 백제 영역에서 일으킨 반란이 확산되었는데 이 김헌창의 난은 신라 왕실에 있어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대란에 가까웠다. 김헌창의 난 진압 이후 즉위한 헌덕왕의 아우 [[흥덕왕]]의 경우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흥덕왕에게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또 다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예영계와의 결합이었다. 그래서 김인겸계의 사실상 유일한 남손에 가까웠던 김충공의 아들 김명([[민애왕]])이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헌정의 아들인 김제륭이 김인겸의 양자가 되어서 어느 정도의 왕위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대신 그의 뒤를 김명이 미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김헌창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김예영의 차남 김균정에게도 어느 정도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균정의 아들 김우징을 시중에 올렸고, 이후 균정까지 상대등에 올리면서 역시 군주에 못지 않은 권한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편에는 무열왕계의 [[김양]](김주원의 증손)이 힘을 보태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흥덕왕 사후 제륭과 균정 숙질간의 왕위 계승 다툼만 부르게 되었다. 김우징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 김균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본인에게 훨씬 유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를 밀었을 것이고, 이것은 이전에 약속된 왕위 계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국 제륭-김명 연합군과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균정이 살해당하고, 김우징과 김양은 세력만 간신히 부지한 채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예영계의 제륭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에 욕심이 생긴 인겸계의 김명이 이홍과 결탁하여 희강왕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민애왕이었다. 한편 희강왕의 자손들은 이때 도피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도피가 훗날 손자 김응렴이 [[경문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청해진으로 도피한 김우징의 세력은 도성의 상황을 꾸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김명(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이 결국 반란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시해당한 희강왕의 자손들도 김우징을 지지하면서 이른바 김예영계가 다시금 힘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사실상 유일하게 혼자 남은 김인겸계의 민애왕은 아무리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하더라도 애초에 군대를 이끌었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어서 불리했다. 그에 반해 김양이나 김우징, 그리고 장보고 등은 이미 실전 경험이 넘쳐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되었다. 결국 민애왕은 [[달벌대전]]에서 대패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왕위는 김예영계가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무왕이 얼마 못가 죽게 되고, 뒤를 이은 [[문성왕]]은 각종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결국 그 와중에 장보고의 반란과 청해진의 혁파와 같은 뼈아픈 일을 맞게 된다. 그리고 문성왕의 뒤를 이어 그의 숙부인 [[헌안왕]]이 오르게 되는데 이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에 가깝다. 어찌 되었든 헌안왕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못가 병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이후 오래전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밀려났던 [[희강왕]] 김제륭 계열의 김응렴이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헌안왕이 역순으로 즉위할 때 희강왕의 남은 자손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헌안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응렴 즉 [[경문왕]]은 각종 난장판을 정리하는데 애썼다. 그리고 왕위 계승에 대한 안정성도 확보해서 자녀들에게 왕위가 세습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선대에 저질러놓은 엄청난 문제점들을 바로 잡기에는 이미 시일이 많이 지나 버린 셈이었고, 결국 그의 딸인 [[진성여왕]] 치세에 통일신라가 분열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문왕이 안정시킨 왕위 세습도 그의 서손인 [[효공왕]] 대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경문왕 이후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박예겸]]의 양자인 박경휘([[신덕왕]])가 효공왕의 매부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박씨가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오랜만에 왕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신라는 후삼국으로 갈라져서 그 힘이 다한 상황이었고, 이후 박씨 왕조는 2대 3군주만을 배출한 채 [[후백제]]의 [[견훤]]에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신라는 수도 서라벌마저 유린당할 정도로 몰락한 상황이었고, 결국 경순왕이 고려 [[태조(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는 1,000년의 장대한 역사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한편 19세기 초반에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에 따르면 [[경순왕]]이 [[문성왕]]의 6세손이라고 했는데, 좀 이상한 부분이 많다. 문성왕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을 최소 880년대생으로 본다면 최대 81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문성왕과 70년의 차이가 난다. 여러 학자들이 경순왕은 문성왕의 5대손이 아닐 것이다라고 비정하기도 하는데 과거에 결혼 적령기가 10대였다는 걸 가정해 본다면 가능하다. 즉, 문성왕의 후손들이 17, 8세에 아들을 얻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계산이지만 조금 억지가 있다. 문성왕 역시 그 아들이 있었음으로 즉위 당시 적어도 20대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김안]]과 김민공은 실제 왕계와는 관계없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