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왕조 (문단 편집) == 6부의 수장이었던 신라의 군주 == 신라는 6세기 초까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매금왕), [[갈문왕]] 등의 명칭을 사용했고, [[지증왕]]이 사탁부의 수장 '지도로 갈문왕'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6부를 초월한 대왕을 자칭하기 시작했으며, 모즉지 매금왕, 즉 [[법흥왕]]도 탁부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아 탁부의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하다가 대왕, 태왕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는 신라가 6세기 초까지만 해도 6부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경상북도 경주시 지역에서 성장한 6개의 지역 정치체, 곧 '''부(部)'''가 연합·연맹하는 형태로 건국되었다. 신라 6부는 씨족적 취락으로서 원래는 족장 아래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사회 조직인 '''촌'''이었는데, [[유리 이사금]]때 와서 *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양부{梁部, 또는 탁부(喙部)} = 훼부 *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 사량부{沙梁部, 또는 사탁부(沙喙部)} = 사훼부 *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 점량부{漸梁部, 또는 잠탁부(岑喙部)} = 모량부(잠훼부) *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 → 본피부(本彼部) = 본파부 *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 한기부(漢祇部) = 한지벌부 *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 습비부(習比部) = 사피부 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6부제(六部制)가 실질적인 행정구역으로 기능한 시기는 경주의 행정구역 명칭이 정해진 469년([[자비 마립간]] 12년)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경주의 고분군(古墳群)이 6개의 씨족별 또는 촌별로 나누어진다는 고고학적인 조사로 보강되고 있다. 신라 6부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면서 연합⋅연맹을 이루었지만, 초기에 각 부는 일정한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단위 정치체의 성격을 유지했다. 각 부 내부의 통치는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부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부의 관원이 별도로 있었다. 신라 전체의 통치는 각 부의 수장(首長)인 '''간(干)'''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신라의 군주는 국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6부 수장 회의를 주재했지만,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으며, 6부 회의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군주는 가장 큰 세력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초기 신라의 역사를 보면 김씨 내부에서도 [[미추 이사금]], [[내물 마립간]], [[지증왕]]이 서로 먼 혈족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이다. 하지만 4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신라는 6부의 연합·연맹 단계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6세기 초에 이르면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각 부의 독자성과 자치성은 점차 약화되어 수도의 행정 구역으로 성격이 변했으며, 6부의 유력자들은 왕권 아래 중앙 귀족으로 변모했다. 6부 관련 기사에 뒤이어 17관등을 제정했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이 역시 훨씬 후대인 6세기 전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한편 6부의 성립이 종전의 6촌을 개편한 결과라는 역사서의 기록에도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6부는 역시 [[사로국]]의 [[진한]] 병합의 정치적 산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신라는 연맹왕국 형성 과정에서 병합한 크고 작은 주변 성읍국가들의 지배층을 경주 일원에 이주시킴으로써 왕경 6부를 편제했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6부의 성립 시기는 일단 내물 마립간의 시대, 즉 4세기 후반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만 6부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6부가 어느 한 시기에 성립된 것인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6세기 금석문 자료를 볼 때 6부 가운데 '''탁부'''{喙部, 또는 양부(梁部)}와 '''사탁부'''{沙喙部, 또는 사량부(沙梁部)} 2부의 압도적인 우세가 간파되기 때문이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마립간 시대에 탁부·본피부·한기부의 3부가 먼저 성립되었다가 뒤에 탁부에서 일부 방계 왕족령과 왕경 외의 지역을 관할로 각각 사탁부와 잠탁부가 설치되었다. 이때 왕경 외의 지역으로 구성된 '''잠탁부'''{岑喙部, 또는 점량부(漸梁部)·모량부(牟梁部)·잠훼부}는 [[지증왕]]의 아내인 [[연제부인]] 이래로 왕비족을 배출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비 박씨나 [[진흥왕]]의 비 박씨는 모두 모량부 출신으로, 어쩌면 모량부가 소위 박씨 족단의 장악 아래 놓인 부였거나, 모량부 출신이라서 후대에 박씨라 불렸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이에 기반해 김씨 이전에 왕실을 장악했다는 박씨 세력집단이 모량부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본피부'''(本彼部)나 '''사피부'''{斯彼部, 또는 습비부(習比部)}는 매우 미약한 존재로 등장할 뿐인데, 과거 석씨 족단의 거점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본피부에서 왕경 외의 지역을 관할로 사피부가 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입택]]에 등장하는 명칭 중 6부를 딴 것이 있는데, 이 중 본피궁은 [[진평왕]] 때만 해도 있었던 다른 궁전인 양궁(탁부), 사량궁(사탁부)과는 다르게 [[신문왕]] 원년(681)에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김유신]]과 [[김인문]]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 이 궁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둘 중 한 가문의 궁궐[* [[김유신]]의 경우, 신라 시대에 [[식읍]]을 하사받은 단 두 명 중 한 명이고, [[김인문]]의 6세손 [[김주원(신라)|김주원]]이 명주군왕이 되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있다.]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계는 물론 가야계 신김씨 또한 근거지가 사탁부였음을 고려하면 사탁부의 팽창으로 인해 사탁부 소속 왕족 일부가 본피부로 이동한 듯하다. '''한기부'''{韓岐部, 또는 한지벌부(漢只伐部)·한지부(漢祗部)}의 존재는 완전히 몰각되어 있는데 허루 갈문왕 및 마제 갈문왕이 이곳 출신이다. 초창기 김씨 족단의 거점이었다가 김씨의 왕위 독점으로 탁부/사탁부로 대거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장인 등흔 각간이 한기부 출신으로 보이며,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 등장하는 '한지□□굴진지 대일벌간'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구진]] 대각간'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