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왕조 (문단 편집) == 계보 == 둘 이상의 기록이 충동하는 군주의 계보는 1차로 당대 [[금석문]]의 계보를, 2차로 《[[삼국사기]]》의 계보를 우선으로 기입했다. 정식 사서가 아닌 것은 기입하지 않되, 《[[삼국유사]]》는 당대 금석문이나 《삼국사기》와 상충하지 않으면 기입했다. 배우자의 이름은 {{{-2 +배우자 이름}}}으로 표시했다. {{{-2 +배우자 이름}}}만 존재하는 경우 두 번째 이후의 배우자이다. 《삼국사기》에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 시기에 등장하나, 이후 다른 가문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세대차가 많이 나는 점과 [[유리 이사금]]의 장인으로 사요왕 김씨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그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아달라 이사금]] 20년(《삼국사기》상 173년)에 조공했다는 [[히미코]]가 실제로는 고령에 즉위해 248년에 사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신라의 시조묘 신라는 6년, 즉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4∼24) 3년 1월에 처음으로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장으로 군주의 누이인 아로(阿老)를 임명해 사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했다. 시조묘의 주신(主神)은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곡령신(穀靈神)의 성격을 띠었다. 남해 차차웅 이후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즉위 의례로서 이사금(尼師今) 시기까지 거의 모든 역대 군주들이 주지했다. 한편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김씨(金氏)에 의한 왕위 독점이 확립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군주의 성격과 더불어 시조묘 제사의 내용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487년(소지 마립간 9) 2월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면서 종래 시조묘의 역할을 신궁이 대신하게 되었다. 신궁 설치 이후 시조묘에 대한 기사는 신라 말인 801년(애장왕 2) 2월, 813년(헌덕왕 5) 2월, 833년(흥덕왕 8) 4월의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특히 신라 중고기(中古期)와 중대(中代)에는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 시조묘와 신궁과의 관계 시조묘와 신궁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승관계설과 병존관계설로 크게 나누어지며, 그와 관련해 신궁의 주신도 박씨 시조설, 김씨 시조설, 태양신설 또는 천지신설 등이 있다. 한편 신라 중대 초인 신문왕(神文王, 681∼691)대에 중국적 종묘(宗廟) 제도로서 '''오묘제(五廟制)'''가 등장했으며, 그 주신은 김씨 시조신과 군주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신라의 묘제가 이처럼 '''시조묘→신궁→오묘제'''로 변천해 간 것은 신라 사회의 발전과 왕실 세력의 교체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박씨에서 석씨, 다시 김씨로의 왕위 계승, 김씨족 내에서 가계의 분화에 따른 가계 간의 왕권 교체, 그리고 사회의 분화·발전과 중국 유교 문화의 수입·정비에 의한 왕자(王者)의 샤먼적 성격의 탈색 등의 변화는, 농경신으로서의 박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의 기능을 제한·축소시켜 나갔다. 시조묘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묘제의 최초의 모습으로, 그 역할과 기능이 신궁과 오묘제로 계승,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고려·조선시대의 묘제인 원묘(原廟)와 종묘제(宗廟制)로 계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