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왕조 (문단 편집) === 성골 왕실(중고) === [[동륜태자]]의 자손들은 모두 [[석가모니]] 가족의 이름을 땄다. [[성골]]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대목. ||<|13>'''{{{#fbe673 23.}}}[[법흥왕|{{{#ffffff 원종}}}]]'''[br]{{{-2 {{{#fbe673 +}}}[[보도부인|{{{#ffffff 보도}}}]]}}} ||<|13>[[지소태후|지소]][br]{{{-2 +[[김입종|입종]]}}} ||<|8>'''{{{#fbe673 24.}}}[[진흥왕|{{{#ffffff 삼맥종}}}]]'''[br]{{{-2 {{{#fbe673 +}}}[[사도태후|{{{#ffffff 사도}}}]]}}} ||<|4>[[동륜태자|동륜]][br]{{{-2 +[[만호부인|만호]]}}} ||<|2>'''{{{#fbe673 26.}}}[[진평왕|{{{#ffffff 백정}}}]]'''[br]{{{-2 {{{#fbe673 +}}}[[마야부인#s-2|{{{#ffffff 행의}}}]]}}} ||'''{{{#fbe673 27.}}}[[선덕여왕|{{{#ffffff 덕만}}}]]'''[br]{{{-2 {{{#fbe673 +}}}[[음갈문왕|{{{#ffffff 음}}}]]}}} || ||[[천명공주|천명]] || ||[[김백반|백반]] || ||[[김국반|국반]][br]{{{-2 +[[월명부인|월명]]}}} ||'''{{{#fbe673 28.}}}[[진덕여왕|{{{#ffffff 승만}}}]]''' || ||<|3>'''{{{#fbe673 25.}}}[[진지왕|{{{#ffffff 사륜}}}]]'''[br]{{{-2 {{{#fbe673 +}}}[[지도부인|{{{#ffffff 지도}}}]]}}} ||[[비담]] || ||<|2>[[김용수(신라)|용수]][br]{{{-2 +[[천명공주|천명]]}}} ||[[알천]] || ||'''{{{#fbe673 29.}}}[[무열왕|{{{#ffffff 춘추}}}]]'''[br]{{{-2 {{{#fbe673 +}}}[[문명왕후|{{{#ffffff 문명}}}]]}}} || ||[[김후직|구륜]] ||선품 ||[[자의왕후|자의]] || ||<|4>[[숙흘종]] ||<|4>[[만명부인|만명]][br]{{{-2 +[[김서현(신라)|서현]]}}} ||[[김유신|유신]] || ||[[김흠순|흠순]] ||[[김반굴|반굴]] || ||[[보희]] || ||[[문명왕후|문명]] || ||[[만호부인|만호]] || [[백제]]도 과거에는 서양처럼 인칭+왕을 사용하고, 24대 [[동성왕]] 때부터 시호를 사용했지만[* 이후에도 생전에는 인칭+왕을 여전히 사용했다.] 신라는 유독 시호를 사용한 시기가 늦은 편이다. 신라 시호 제도의 시초에 대한 기록은 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지철로왕>조에서는 지증왕의 시호인 '지증(智證)'이 최초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법흥왕의 시호인 '법흥(法興)'이 최초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자면 신라인들은 지증왕 혹은 법흥왕 즈음부터 시호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예컨데 법흥왕이 아직 죽지 않고 왕위에 있었던 535년경, 울주의 천전리각석에 새겨진 명문(<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에 따르면 법흥왕은 이미 살아있었을 적에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불렸음이 확인된다. 또한 진흥왕이 생전인 568년 즈음에 변방을 순수한 후에 세운 「북한산비」 · 「황초령비」 · 「마운령비」 등의 진흥왕 순수비에서도 모두 진흥왕을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 일컬었다. 이런 케이스는 국내의 금석문 뿐 아니라 중국 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컨데, 《[[북제서]]》에서는 진흥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 했다. 또한 《[[수서]]》에서는 진평왕의 이름을 '김진평(金眞平)으로, 《[[구당서]]》에서는 선덕여왕의 이름을 '김선덕(金善德)'으로, 《장안지》에서는 진덕여왕의 이름을 '김진덕(金眞德)'이라 했다. 즉 [[지증왕]] ~ [[진덕여왕]]까지만 해도 생전부터 사용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시호가 아니었다. 거기다 명명법을 보면 불교적 법명이나 이명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름+군주명을 사용했던 신라의 초기 관습이 진덕여왕 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크게 상고 · 중고 · 하고의 3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고기의 군주들, 즉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23대 법흥왕으로부터 24대 진흥왕 · 25대 [[진지왕]] · 26대 [[진평왕]] · 27대 [[선덕여왕]] · 28대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군주들이 불교적 관념이 짙게 베어든 왕호를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군주가 죽은 이후에 붙여지는 시호로 보기에는 어려우며 군주들의 불교식 법명 내지는 존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그 이전의 20대 자비 마립간과 22대 지증왕의 이름도 불교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는 신라 김씨 왕실이 불교 수용과 공인을 통해 그 권위를 강화시켜 나갔던 점에서 기인한다. 법흥왕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교 공인(528) 이전에는 「울진봉평비」(524)에서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으나, 이후의 금석문인 <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535)과 <울주천전리각석 추명>(539)에서는 각기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 등의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처럼 신라에서 군주를 뜻하는 토속어인 "매금"이 "대왕" 혹은 "태왕"의 칭호로 대체되고 있는 모습은 군주의 권력과 위상의 변동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군주의 권위와 불교 신앙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그 외의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데 진흥왕은 흥륜사를 창건하였고,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동륜과 사륜(훗날의 진지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고대 인도에서 왕권의 강화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던 불교의 이상적 군주관, 즉 '전륜성왕' 관념과 연관이 깊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과 그 두 아우 등에게는 백정 · 백반 · 국반 등을 비롯하여 석가모니의 부친 및 숙부들에게서 차용한 이름이 붙여졌고, 진평왕의 왕비 또한 석가모니의 모친에게서 차용한 마야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는 김씨 왕실의 일원들을 석가모니의 혈족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와 신성성을 강화하는 이른바 '''[[성골]](聖骨)''' 관념이 작용된 결과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신라의 군주들이 불교식의 법명과 존호를 사용했던 것 또한 이러한 추세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한편 이렇게 볼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서 신라 최초의 시호로 전해지는 지증왕이나 법흥왕 등의 명칭은 사실 시호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는 법흥왕 이후로 즉위한 다른 중고기의 신라 군주들(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등)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점이다. 당시의 군주들이 불교식 법명 내지는 존호를 사용했던 것이 훗날 시호를 사용한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추사 [[김정희]]는 태종 무열왕([[김춘추]])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호가 사용되었으리라 보았다. 실제로 김춘추는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인 [[문무왕]](김법민)으로부터 "태종(太宗)"이라는 묘호와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중국식 시호를 받았다. 신라에서 시호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도 무열왕과 문무왕이 등장한 신라 중대 이후일 것이다. 기록에는 사장되었지만, 이때 김씨의 시조인 [[성한왕]]이 "태조"로 추존되었다고 본다. 한편 진흥왕의 두 아들 동륜태자와 진지왕 계열의 문제로 인해 성골 개념이 생겨났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동륜태자의 아들로 진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 동륜 계열을 성골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그의 사후 두 여왕들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골 개념의 강조 속에서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성골 남성 자손은 원래 진골로 강등이 되었던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 계열만 남게 되었고, 결국 김춘추가 여왕들의 치세 때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김해 김씨 계열과의 돈독함을 통해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