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평가 (문단 편집) === 신라가 실패한 이유: 극복하기 어려웠던 성공기의 유산 === 분명히 신라는 폐쇄적인 고대 사회의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삼한통합을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유독 고대 국가 신라만 다른 한반도 국가들만 못했거나 본디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오늘날의 우리가 폄하해선 안 된다. 이는 배타적인 전제군주정 국가나 소수민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경우 지금도 '왕가, 지배층>국가'임을 고려해보면 알 수 있다. 현대 국가인 [[아랍에미리트]]가 그런 것들과 비슷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908만여 명 중 11%인 106만 명만이 내국인에 해당하는 시민권자이며 나머지는 전부 외국인이다. 소수의 내국인은 막대한 이익과 복지와 권한을 독점하고 있고 시민권을 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외국인들은 소수의 고학력 고연봉 직업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금이 낮거나 힘든 직종에 종사한다. 물론 이 체제의 경우 어차피 외국인들이 영구정착보다는 본국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에 온 것 뿐이기에 마음에 안 들면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 유지되고 있다. 극단적인 케이스지만 [[북한]]도 국가와 국민 자체를 희생물로 사용하여 지배층과 김씨 왕가의 배타적인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이 극단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무역 등 시민사회 성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가보위성]]을 비롯한 믿을 수 있는 엘리트 관료집단에게 모든 이익을 독점적으로 몰아주어 자국민을 감시하게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순수한 민족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주장하는 모습이 무색하게도 피지배층을 이민족에 가깝게 여기고 있는 모습인데 이러면 당연히 피지배층의 불만이 쉽게 많이 쌓이게 되는 만큼 정국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체제를 구태여 유지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지배층끼리는 결속과 동질성이 강한 반면 피지배층에 대해서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특권을 포기하길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외에도 고대사회의 경우 특권유지를 넘어서는 전근대인들 특유의 세계관적인 이유도 있는데 불안정한 정국이 반복되어 지배층들끼리도 서로 죽이면서 싸우는 게 흔했던 전근대 사회에서도 지배층의 사직이나 종교, 문화만큼은 피지배층 혹은 이민족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권력싸움까진 몰라도 그런 것까지 외부세력에게 양보하는 순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 혹은 세계 그 자체가 끝난다고 여겼기 때문.''' 역시 유사전근대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지배층 또한 자신들이야말로 숭고한 민족의 순수성과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기에 특권을 누리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자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발전과정을 봐도 신라의 경우 삼국 중에서도 특히 배타적으로 발전해왔다. 한반도 세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던 중원이나 유목 세력과 대적하면서 발전해온 고구려의 경우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유력한 외부세력의 흡수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한국계 이민족은 물론이고 한족이나 유목민도 광범위하게 지배층으로 흡수되었다. 백제의 경우 초창기 잘나갈 때는 몰라도 수도 한성을 잃고 국가멸망 위기에 몰리게 되면서부터는 왕가와 기성 귀족의 위상이 크게 떨어지고 토착 세력을 광범위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여러 이민족을 규합하면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는 일단 지리적으로도 소백산맥 뒷쪽에 고립되어 있었고, 초창기 발전과정에서 외부 유입세력이 지배층으로 흡수된 이후로는 체급이 비슷하거나 적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한반도 세력들하고만 각축전을 벌이면서 딱히 외부세력 영입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지배층 자체가 쭉 고립되어 있었다. 즉 정리하면 지배층이 극도로 배타적인 집단인 상황에서는 지금의 [[북한]]처럼 지배층이 지배층의 번영보다 국가의 안위를 신경쓰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인 것이다. 물론 이는 상기한 바와 같이 명백히 망국으로 가는 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도 그럴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나 외부세력이 광범위하게 유입되어 감히 지배층의 순수한 사회문화가 더렵혀지고 변질되는 것이나 그 고대적 세계관을 가진 배타적인 지배층에게는 세계관의 멸망이란 측면에선 어차피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는 개혁을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천재지변이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배타성을 박살낼 이민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유입되거나 그들에게 정복당해 사회가 뒤집히거나 혹은 그러한 위협이 발생해 내부적으로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생기거나, 아예 반란 등의 체제붕괴로 해소될 수밖엔 없었을 텐데 신라는 자국 국력이나 사회•문화적 역량으로는 도저히 달성하는 게 불가능했을 삼국통일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외부 세력인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갑작스럽게 달성[* 그러나 삼국통일을 위한 신라의 노력을 무시한채 당나라 덕분에 운 좋게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는식의 관점은 옳지 못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이루어낸 내부 개혁과 무수히 많은 외교적 노력등 삼국통일까지의 그 과정들을 살펴본다면, 결코 갑작스럽게 삼국통일을 이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섬처럼 고립된 지형에서 오랜 기간 평화가 유지되어 고대국가적 배타성을 극복할 개혁의 드라이브가 발생할 일도 그걸 박살낼 외부세력에게 정복당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기존 신라의 영토 정도야 [[가야]] [[금관국]] 지배층(진골)과 진한 소국 지배층들(6~4두품)에게 약간의 특권을 주는 정도로도 고대사회적 배타성을 유지하면서 소화가 가능했겠지만 이미 각자 독자적으로 원숙한 수준의 발전을 이룩하여 높은 사회문화적 역량을 키우고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존 지배층들에게까지 그런 고대사회적 차별을 적용하면서 신라인으로 동화시키는 건 무리였다. 실제로도 끝내는 연이어 터진 반란을 통해 체제가 붕괴하게 되었고 동화에도 실패해 기존 삼국의 유민의식 또한 그대로 이어져 옛 지도를 거의 그대로 따라 다시 갈라진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단일한 국가의식이 완성된 건 고대국가적 체제를 극복한 고려 대에 가서야였다. 또한, 신라 특유의 배타적인 골품제는 적어도 통일신라 중기부터는 [[경덕왕]]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정도로 지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켜 나라가 망하는 1등 원인이 되고 말았으나, 적어도 삼국 쟁패기 때는 지배층 내부 간의 규율을 단속하고 수도와 지방 사이 위계질서를 확고히 세우는 데 도움을 주어 삼국통일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무시할 순 없다. 어느 나라나 문제가 되는 건 왕실 본가와의 대수가 멀어진 끝에 일반 귀족으로 전락한 방계 왕족이나, 지방에서 힘을 키운 호족이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네 집안 혹은 지역 이득만 앞세운다는 점인데, 백제나 고구려 모두 이 문제로 꽤나 고생한 편이지만 신라는 피지배층/지배층간 규율이 엄격했던 만큼이나 지배층간 내부에도 격차를 두어 이 구분이 엄격했기에, 적어도 신라는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골품제가 위기 단속에는 도움이 되어도 장기적으론 신라 왕실에 해가 될 수 있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었음을 신라 왕실이 모르지 않았다. 진골의 입김이 미치지 않도록 서라벌과 먼 지역에서 왕실이 직할하는 정예 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한 게 이미 [[눌지 마립간]] 때부터 일이며, [[진흥왕]] 때 서라벌 근위 사단과 서라벌 왕궁 근위대 체제 자체가 완전히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진골은 아예 왕궁 근위대에 장교로든 병사로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는 진골 집단이 신라를 최일선에서 수호하는 집단인 동시에 확장성을 저해하며 왕실도 자기네 계급 이익에 크게 저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해코지할 수 있는 집단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했던 조치였다. 다만 진골 집단의 강한 힘 탓에 무열왕계 왕실은 그나마 삼국통일전쟁 및 나당전쟁으로 얻은 군공과 권위를 통해 진골들을 제어하며 가능한 선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최대한 추진했으나, 다들 아다시피 혜공왕이 살해당하면서 등장한 원성왕계 왕실은 본인들 자체가 그 진골 집단의 일원이었던데다 무열왕계 왕실만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기에 이런 과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그리고 그렇다고 원성왕계 왕실이 개혁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상술했듯 부족한 권위 아래에서도 노력한 몸부림의 결과가 [[독서삼품과]]와 청해진 등이었다. 또한 원성왕계 왕실이 결국은 했어야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백수십 년 동안 미루고 미뤘던 개혁을 특유의 똘기로 불과 5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해치워버린[* 패서 및 평양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 관철 그리고 그것에 반항하는 패서 호족 숙청, 진골 관할 토지 몰수 및 지배층 보유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 법제화, 진골 같은 기득권층의 권력 온상이 될 수 있는 병부에서 군령권 완전 박탈] [[궁예]]가 끝내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한 걸 봤을 때는, 원성왕계 왕실만 유독 개혁을 못했다고 타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해내야만 하는 급진 개혁이란 게 말로는 쉬워보여도 그것이 본인과 본인 집안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면 누구든 망설일 수밖에는 없다. 원성왕계 왕실도 가능한 선에서는 어떻게든 개혁해서 신라를 이끌어가려 노력했지만, 오랜 고대의 숙명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약 원성왕계 왕실에 궁예처럼 기득권층인 진골들과 대놓고 정면대결할 용기가 있는 군주[* 고려의 광종, 조선의 태종이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가 나타나 개혁을 완수했다면 또 어찌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IF의 영역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신라, version=1788)] [[분류:신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