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구 (문단 편집) == 이후 == 신라구는 930년대까지도 존재했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사회가 안정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어느 정도 강화되면서 신라구의 존재는 대체로 사라진다. 하지만 후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일본에선 여전히 신라구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10~11세기에 고려인 해적이 출몰해 규슈를 약탈한 기록이 몇 차례 등장하는데, [[아마미]] 제도 해적이나 여진족 해적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일본 여러 기록에 섞여있다. 11세기 동여진 해적들이 일본을 약탈했을 때는 동여진 배후에 고려가 있을 것이라 의심했으나 고려가 일본인 포로 259명을 다시 일본에 송환하면서 그 오해가 풀리고 처음으로 고려와 일본 간의 국서가 오고가기도 했다. 헤이안시대 일본에서 국풍이 발달하고, 대외교류가 줄어드는 전적인 원인이 신라구는 아니었지만, 한 계기가 되었다. 삼국시대 때부터 [[백제]]와 일본이 친했고 신라는 일본과 사이가 나빴다는 쪽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통일신라]]는 백제 때만큼 밀접하게는 아니라도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내내 상당히 활발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다. 통일신라가 무너지기 전 9세기까지는 [[장보고]]로 대표되는 국제 사무역이 어느 정도 활발했으나, 일본 서부가 해적에 탈탈 털려 학을 떼고 신라인 입항 금지, 귀화 금지, 이미 머물던 신라인은 해적을 도울 수 있다는 구실로 동쪽으로 강제이주시키고[* 그래서 현재까지도 동일본 지역에 신라계 도래인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한다.] 난 후, 10세기쯤 되면 사무역도 감소했다. 후삼국 성립 이후 [[후백제]]는 일본에 옛 백제 시절의 인연을 상기시키며 적극적으로 통교 요청을 했지만 니들도 신라 신하 아니냐고 해서 사신은 전부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한다. 신라구란 당연히 원신라 영역(경상도) 출신 해적만 말하는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역 전체에서 온 해적을 통틀어 말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백제 유민이라고 해적질과 상관이 없다고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신라구 중 원신라계나 고구려계, 더러는 당나라계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 외에 많은 수는 옛 백제 영역 출신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신하니까 안 받겠다는 건 명분상의 이유인데 견훤은 칭왕 이후에도 신라의 신하를 자칭한 경력도 있고 해서 꼬투리 잡히기 좋았다. 고려 왕조와도 건국 후 약 100여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분류:통일신라]][[분류:헤이안 시대]][[분류:남해의 해적]][[분류:9세기 해적]][[분류:10세기 해적]][[분류:한국의 범죄조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