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구 (문단 편집) === 869년의 신라구(貞觀の入寇) === 869년 5월 22일, 신라 해적이 두 척의 큰 배를 타고 [[하카타]]([[후쿠오카]])에 상륙해 토요쿠니노미치노쿠치([ruby(豐前國,ruby=とよくにノみちノくち)])에서 수도 교토로 보낼 공물을 약탈해갔다. 일본 측은 군사를 보내 뒤쫓았으나 일본군의 기강이 해이해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아 대부분 사로잡지는 못했고, 해변의 백성 5, 6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쫒아가 싸우다가 활을 쏘아 두 해적에 부상을 입힌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일본군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일본 중앙정부는 여기를 관할하는 [[다자이후]]를 강하게 비난, 견책 처분하고 국방체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869년 12월 14일, 29일에도 신라 해적의 극심한 일본 침입과 약탈이 신궁과 신사에 보고됐다. 870년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ruby(卜,ruby=うら)][ruby(部,ruby=べノ)][ruby(乙,ruby=おと)][ruby(屎,ruby=くそ)][ruby(麻呂,ruby=まろ)])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으며,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개인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당시 신라 [[경문왕]] 정권이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대마도 정벌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 발발까지 20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히고, 또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기지였을 수도 있다. 국가적인 침공 준비였다면 무엇보다도 보안에 철저해야 했을 텐데 이미 사로잡은 목격자를 살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869년의 공물 약탈에 위의 대규모 전쟁 준비 썰까지 겹치자 일본 측은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다자이후 관할에 있는 일본 서부지역 전체의 신라인들을 [[무츠]] 등 일본 동부로 강제이주시킨 후, 구분전(口分田)을 주고 귀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신라인을 강제이주시킨 일본 동부는 현대에야 [[수도권(일본)]]과 [[도호쿠]] 지역으로 일본화가 완료됐지만 당시는 [[야마토 민족]]과 구분되는 [[에조]]와의 다툼이 계속되는 황량한 미개척지였다. 870년 9월, 신라 해적에 가담한 혐의로 신라 상인 윤청(潤淸) 등을 일본 동부 [[도호쿠]]로 유배시킨다. 윤청 등은 [[기와]]를 만드는 재주가 있어 기와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하고 일본인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도록 명령했다. 870년 11월 13일, 다자이후의 쇼니(少弐) 후지와라노아소미 겐리마로([ruby(藤,ruby=ふぢ)][ruby(原,ruby=はらノ)][ruby(朝臣,ruby=あそみ)][ruby(元利万侶,ruby=ゲンリまろ)])[* 모리마로라고도 한다. 万은 麻로 쓰기도 한다. [[후지와라노 카마타리]]를 [[시조#s-1|시조]]로 본다면 [[후지와라|후지와라노아소미]] 7세손이고 식가(式家) 4대손이며 후술할 후지와라노 쿠니츠네의 사종숙(四從叔: 11[[계촌법|촌]] 아저씨)이다.] 등 다섯 사람이 신라인과 내통해 모반을 계획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쇼니란 신라구를 소탕하는 군사업무를 하던 관직이었지만 한 가문이 독점하게 되면서 가문명으로 바뀌었으며, 신라구와 내통했던 경험 때문인지 나중엔 왜구의 최대 스폰서가 되어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872년 5월 [[발해]] 사신단 60명이 배 2척에 타고 [[사쓰마]]에 표착했지만, 서로 말이 다르고 의심스러워 신라 해적이 일본과 친밀한 발해인을 사칭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붙잡았다. 한 척은 예인 도중 도망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